"여운형, 외모·말솜씨 뛰어나고 기개 넘쳐
좌우합작 도모 '척추가 없다' 비난 받기도"


1945년 광복이 찾아오자 국내외의 많은 정치 지도자들이 활동을 본격화했다. 그 중에서도 초기 정국을 주도한 인물은 몽양(夢陽) 여운형(?運亨·1886~1947)이었다.

국내에서 활동하며 일제 말 ‘건국동맹’이란 지하조직을 만들었던 몽양은 이를 기반으로 재빠르게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를 발족시켰다.

하지만 건준이 조선공산당 등에 의해 좌경화되고, 좌·우 대립이 심화되는 가운데 1947년 몽양이 암살되는 바람에 그는 오랫동안 ‘좌파’로 분류되면서 금기의 대상이 됐다.

생존 인물 중에서 몽양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이기형(李基炯·88) 전 민족문학작가회의 고문이다.

스무 살을 갓 넘긴 청년으로 1938년 몽양을 처음 만난 뒤 1947년 암살 때까지 곁에 머물렀던 그는 1984년 몽양 평전을 쓰기도 했다.

그는 1980년대 이후 왕성한 시작(詩作) 활동을 했으며 지난달엔 후배 문인 90여명과 함께 민족작가대회 참가차 북한을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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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 여운형의 측근이었던 이기형옹이 조선일보 인턴기자 임수영(미국 웰슬리 대학 2년)씨에게 광복전후 여운형의 활동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전기병기자

―몽양을 어떻게 만났습니까?

“우선, 다른 사람들이 나를 몽양의 ‘비서’라고 불렀지만 나는 공식 직함을 가진 적이 없어. 게다가 건준에도 참여하지 않았으니까.

다만 한 문학청년으로서 그를 흠모했을 뿐이지. 함경남도 함주 출신인 나는 함흥고보를 졸업한 뒤 청년들을 이끌어 줄 유능한 지도자를 찾아다녔어.

선배들이 서울 보성고보의 동양사 선생을 만나라고 조언하더군. 그가 우리나라에서 거의 처음으로 유물사관 역사서를 쓴 문석준이었어. 내 얘기를 들은 문석준은 ‘여운형을 찾아가라’고 하더군. 당장 서울 계동 몽양 자택으로 향했지.”

◇건준위 활동 광복직후 건국준비위원회에서 발언하고 있는 몽양.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제공

―첫 인상은 어땠습니까.

“몽양은 나를 보고 ‘이 군이 조선독립에 대해 궁금해서 왔군’이라며 반색하더니, ‘지금 히틀러나 무솔리니, 도조 히데키(東條英機)가 하는 꼴을 보면 닭싸움과 비슷하다.

정신없이 맞은편 돌벽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고 말했어. 당시 상황에서 경찰 끄나풀일 수도 있는 신원 모를 청년 앞에서 몽양은 민족 해방의 당위와 그 가능성에 대해 일말의 주저도 없었지. 기개가 정말 대단했어.

몽양과 이야기가 한창일 때 쨍그랑거리며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야구공 하나가 마룻바닥으로 날아 떨어졌지. 담장 저쪽은 휘문고보 운동장이었거든.

몽양이 빙긋 눈웃음을 치며 공을 집어 마당으로 나가 낮은 담 너머로 학생들을 부르더군. 그리곤 ‘공 예 있어. 씩씩하구먼. 맘껏 뛰놀아!’라고 말하는 거야. 사람을 단번에 끄는 걸물이었어.”

―느닷없이 다가온 광복이었는데도 몽양은 대단히 기민하게 대응했습니다.

“백범 김구가 상하이·난징·충칭 등지를 떠돌며 항일 투쟁을 전개하다 창졸간에 광복을 맞은 반면 국내에서 활동해 온 몽양은 이미 1년 전인 1944년 8월 일본 패망과 조국 광복을 대비하기 위해 비밀결사인 ‘건국동맹’을 조직한 바 있어요.

그랬기에 광복 당일 저녁에 건준을 만들 수 있었지. 여운형은 좌·우익을 막론하고 조선의 지도급 인사들을 되도록 빠른 시간 내에 규합하려 했어.”

8월 15일 낮 12시 일왕이 공식 항복 성명을 발표했을 땐, 몽양이 이미 아침 총독부 제2인자인 정무총감 엔도(遠藤)의 호출에 응해 담판을 짓고 난 뒤였다.

몽양은 수명을 다한 총독부 수뇌부와 만나 일본인의 무사귀환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정치·경제범 즉각 석방 ▲3개월간의 식량 확보 ▲치안 유지와 건국을 위한 정치운동에 간섭 절대 불가 등 5개 조항을 요구했다.

―건준은 빠르게 조직을 갖췄습니까.

“좌·우익 지식인은 물론 각지의 유지까지 광범위하게 참여해 폭넓은 지지를 얻었어요. 이는 중심 인물이 몽양이었던 덕분에 가능했다고 나는 지금도 믿어 의심치 않아.”

―하지만 건준에 대해 비판적인 세력도 많지 않았습니까.

“우익들은 화신백화점에 ‘벽상조각(壁上組閣·기초가 약한 조직)’이라 크게 써 걸며 비난했어. 미군이 들어오기 전에는 숨도 못 쉬고 있다가 미군정 체제가 되자 매우 공격적으로 나왔지. 나는 건준의 실패를 미군정과 우익들의 공작으로 봐요.”

여운형은 국내 우파의 중심인물 중 한 명인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를 건준에 꼭 합류시키고 싶어 했다.

“몽양은 고하에게 두 차례나 사람을 보냈지. 세 번째는 직접 찾아갔어. 몽양의 눈에 고하는 우익 중에서 최고의 정치적 식견을 가진 인물이었거든.” 그러나 송진우는 건준 참여를 끝내 거부했다.

―여운형은 미군이 진주하기 직전에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습니다. 다소 급조된 감도 없지 않은데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요.

“몽양은 우리 조선 민족이 자치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미국측에 보여주고 싶어 했어.

그래서 서둘렀던 것 같아. 좀 다른 얘기지만 조선인민공화국 주석직에 몽양 아닌 이승만이 오른 것은 박헌영의 배후 조종이었다고 봐. 중앙인민위원회 51명 중 3분의 2가 공산주의자였으니까. 박헌영은 몽양의 힘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했거든.”

―몽양은 어떤 계기를 통해 백성들에게 알려지게 됐습니까?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이었어. 일본 조야(朝野)는 조선 통치에 관한 의견교환을 내세우며 그해 12월 임정 의정원 의원이었던 몽양을 초청했지.

동경 제국호텔에 모인 일본 각계 인사 앞에 선 33세의 여운형은 ‘조선 독립운동의 진상과 그 의의를 밝히려고 이곳에 왔다’고 운을 뗀 뒤 ‘일본인에게 생존권이 있을진대 똑같이 조선 민족에게도 생존권이 있다.

조선의 독립운동은 세계의 대세요, 신의 뜻이며 한민족의 각성이다’라고 열변을 토했지. 그 연설로 몽양은 하룻밤 사이에 영웅이 됐지. 도산 안창호가 차분히 이야기하는 타입이라면 몽양은 포효하는 스타일이랄까.”

―몽양은 어떤 점이 뛰어났습니까.

“한마디로 완벽했어. 독립운동 했지, 신문사(조선중앙일보) 사장이지, 인물 좋고 말 잘하지….

하루는 몽양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동경에서 제일 번화하다는 긴자 거리를 산책하는데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감탄하는 표정으로 돌아다보는 거야. 괜히 나까지 어깨가 으쓱해지더군. 일본에도 남자는 많지만 몽양만큼 준수한 사람을 처음 봤을 테니까.”

―노선이 불분명하다는 비난도 있었습니다.

“그렇긴 하지. 내가 한때 근무했던 중외신보의 당시 편집장은 ‘그 인간은 척추가 없어’라 말하곤 했지. 좌우를 아우르며 합작을 도모했기에 그랬을 거야. 몽양에 대해 중도좌파라고들 하던데 가까이서 지켜본 나로서는 진보적 민족주의자라 부르고 싶어.”

여운형은 1947년 7월 19일 낮 1시 자택을 나서다 길을 막아 선 트럭 안에서 발사된 총탄에 후두부를 관통당해 사망했다. 범인은 한지근(19·본명 이필형)이라는 이름의 청년이었다.

범인은 무기수로 복역 중 6·25 때 행방불명됐다. 당시 항간에는 공범과 배후가 있다는 풍문이 널리 퍼졌고 몽양 유족에게도 같은 내용의 투서가 전달됐었다. 27년 뒤인 1974년엔 임시정부 행동대원 출신 4명이 스스로 공범이라고 주장하고 나서기도 했다.

―이 옹은 몽양 서거 후 33년 동안이나 칩거 생활을 했습니다.

“정신적 지도자를 잃고서 모든 게 허망하더군. 나에겐 이순신만큼 위대한 인물이었으니까. 분단 조국하에서는 시를 절대 쓰지 않겠다고 다짐하곤 모든 공적 활동을 중단했지. 1980년 후배 문인들에게 설득당하기 전까지 서울 뒷골목을 전전했어.”

―올해 몽양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습니다.

“광복 이후 꼭 60년 만이요. 만시지탄이지만 참으로 다행인 일이지. 그는 ‘적색 분자’의 두목이 아닌 조선 민중의 지도자였어. 제대로 평가해야 할 인물이오”/신용관기자 qq@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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