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고 낡은 책상, 평양 학교와는 딴판

평양에서 김책시로 추방된지 20일만인가, 김책시에서 우리 가족이 ‘항일투사가족’이라고 아파트를 주었다.

이 아파트는 김일성이 김책시를 방문, 바다가 바라보이는 산중턱에 2000가구 아파트를 지어 어로공들이 집에서도 파도소리를 들으면서 쉬도록 하라고 지시한 데따라 지은 것이다. 집은 방 2칸, 화장실, 부엌, 조그마한 전실로 돼 있었다.

다 좋은데 한가지 불편한 점이 있었다. 평양에서는 밥 지을 때 석유 곤로로 하는데 김책에서는 나무로 직접 불을 때서 해먹어야 했다. 불을 피울줄 모르기 때문에 윗집 할머니에게 도움을 청했다.

할머니는 송진을 들고 내려오시더니 거기에 불을 붙이고 나무에 불을 지폈다. 마술사 같았다. 우리 가족은 할머니 옆에 앉아 연신 "와~"하는 감탄사를 발했다. 남의 도움을 받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우리가 직접 불을 때야 했다. 어머니 혼자 부엌 바닥에 앉아 한 30분 동안 씨름하시더니 "붙었다!"하고 소리를 치는 것이었다. 달려 나가보니 어머니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앞의 머리카락은 불에 그을려서 다 타들어가고 얼굴은 새까맣게 먹칠하고, 눈엔 시커먼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김책시에서 1년 반을 살았는데 불을 땔 때마다 이런 일은 되풀이 됐다.

나는 김책시에 온지 두달 후인 1996년 2월, 김책고등중학교에 편입하였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깜짝 놀랐다. 교실 안에는 다 찌그러져가는, 그야말로 평행사변형 책상들에(쥐도 배가 고팠던지 책상을 엄청 갉아 먹어 놓았다) 살이 다 빠져서 씨글떡씨글떡거리는 의자들. 가운데는 고철더미(겨울용 난로)가 솟아있었다. 평양의 교실과는 너무나 딴판이었다. 여기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땅이 맞는가 의심이 갈 정도였다.

교실 맨앞 책상에 조그마한 아이들이 앉아 있었다. 속으로 "선생님 자식인가보다"하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학급 아이들이었다. 영양상태가 좋지 않아 키가 자라지 못하고, 까무잡잡했다. 교복은 언제 선물받았는지도 모를 정도로(교복은 김일성 생일이나 ‘기분좋은 날’에 학생들에게 선물이라는 이름으로 나누어줌) 그야말로 ‘절약형’의 옷(바지가랭이가 발목 위에 걸려 있고, 여학생들의 치마는 조금만 숙이면 속이 다 들여다보이는 정도임)들을 입고 있었다. 여학생들 양말(스타킹)은 깁고 또 기워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형편이었고, 신발 또한 발가락이 땅을 긁고 다닐 정도였다. 만일 평양의 학생들이 이런 상태로 다닌다면 아마도 당중앙에서 난리가 났을 것이다.

학생들의 학습장(공책) 또한 가관이었다. 나무로 종이를 만든다는 것을 확인이라도 시키듯이 나무 조각들이 종이 도처에 박혀있고, 색깔도 시커멓다. 그런 학습장도 없어서 12과목정도 되는 학과들을 한 권으로 다 쓴다. 이 와중에도 김일성, 김정일의 혁명활동 과목은 고급 학습장(종이가 하얗고 좋은 책)을 쓰도록 했다. 만일 나쁜 학습장에 썼다가는 수령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하다는 등의 구실을 만들어 비판투쟁을 벌인다./한수정ㆍ연세대 사회학과 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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