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식량난은 말 그대로 생존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무기 중 하나가 배낭이다.
◇ 북한에서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배낭을 만들어 지고 다니는 것이 일반적이다. 많은 짐을 넣을 수 있고, 복잡한 기차간 등에서 짐을 건사하기 쉬워 매우 실용적이다.


배낭이 널리 쓰이게 된 것은 북한만의 사정이 있다. 80년대 김일성 교시로 인해 여자들은 물건을 머리에 이지 못하게 됐다. 외국인들 보기에 좋지 않다는 이유였다. 친척을 찾아가거나 멀리 여행을 할 경우에 식량을 챙겨가야 하는데 이 경우에도 배낭이 유용하다.

배급, 월급이 끊겨 생존이 위태로워지면서 북한사람들은 90년대 중반부터 출근 대신 장사를 할 수 있게 됐다. 장사로 연명하는 인구가 급속도로 늘어났지만 물건을 떼다 배낭에 넣고, 다른 곳에 가서 팔아 이문을 남기는 초보적인 장사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장사를 하자면 집에 있는 천 중에서 가장 질기고 튼튼한 것으로 배낭부터 만드는 것이 순서다.

자루모양으로 박아 3m쯤 되는 굵고 긴 끈 하나를 자루 입구에 끼워넣어 죄고 끈의 나머지 부분을 양쪽 어깨끈으로 쓰는 것이 북한식 배낭이다. 자루 겉부분에 그때그때 무엇이든 집어넣기 좋게 여러 개의 주머니를 만들기도 한다.

배낭은 남녀노소 누구라도 맨다. 가방이 있다손쳐도 긴 여행에서 복잡한 기차간을 견뎌내자면 몸에 딱 붙고 그때그때 죄고 풀기 쉬운 배낭이 실용적이기 때문이다. 이불이나 옷가지 등 아예 집안의 천들을 모아 배낭 장사를 하는 사람도 있다. 장마당에서 사자면 못해도 40원은 줘야 한다. 웬만한 사람 한달 월급의 거의 절반값이다.

많은 사람들이 배낭 하나에 의지해 장삿길을 떠났다가 숫제 국경을 넘어버리기도 했지만 지금도 배낭족 장사꾼의 행렬은 멈추는 법이 없다. 빽빽한 기차역과 기차간, 기차의 지붕에는 사람보다 더 많은 수의 배낭이 있다. 해안지방에서 내륙으로 들어가는 사람의 배낭에는 대개 자반이나, 해조류가 들어 있고, 국경지대에서 오는 사람의 배낭에는 비누, 성냥, 옷가지 등 중국물건이 들어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의 배낭에는 쌀이나 옥수수 등 곡식으로 채워져 있는 경우가 많다.

두둑한 배낭은 누구의 것이든 배낭털이(밸따기)들의 표적이 된다. 장삿길을 나서본 사람이라면 배낭털이들에게 당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라고 한다. 수법도 다양하다. 기차가 도착해서 역주변이 인파로 가득차게 되면 네댓이 조를 짜서 표적이 된 배낭 밑에다 큰 배낭을 받히고, 면도날로 그으면 배낭속에 든 물건이 고스란히 쏟아져 내려온다. 나머지 두 사람은 양쪽에서 배낭끈을 잡아 끌어 무게가 줄어드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게 한다. 솜씨가 감쪽같다고 한다.

기차지붕에 올라타고 갈 때조차 안심할 수는 없다. 배낭을 옆에 세워두고 기대어 있으면 옆에 있던 배낭털이가 모르는 사이 끈 달린 갈고리를 배낭에 꽂아두는 것이다. 그러면 어느새 배낭이 밑으로 서서히 떨어져 내려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역전에서 며칠씩 연착되는 기차를 기다리자면 배낭 때문에 용변 보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50Kg이 넘는 배낭을 끌고 다닐 수도 없고, 타지에서 마땅히 옆사람을 믿기도 힘들다. 아무리 껴안고 자도 누군가 배낭을 들어내가 버리는 일도 다반사라고 한다.

배낭털이들의 아지트를 지켜준 경험이 있다는 한 사람은 "밸따기들이 털어온 배낭 속에는 귀중품도 많이 있어 수입이 짭잘하다"고 말해 준다. 그러나 정작 배낭을 잃어버려 발을 동동 굴러본 적이 있는 사람은 "배낭에 가득 있던 쌀을 송두리째 잃고 나니 죽고만 싶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렇게 당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 서로 위로를 해주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배낭을 지고 장사나가는 사람은 실, 바늘, 천은 꼭 따로 준비해 다닌다. 잃고 나면 다시 즉석해서 만들어야 뭔가 채워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마냥 목을 늘이고 기다리는 가족들을 위해 생존의 양식을 채워넣지 않고서 귀가할 수 없는 사연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대로다.
/ 김미영기자 miyou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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