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하얼빈에서 태어나 광복직후 평양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북한 문화선전부에서 일했으며, 최근까지 러시아에서 신문기자로 활동했던 러시아 고려인 3세 김 블라지미르(70·한국명 김준호)의 소설이 국내에서 출판됐다.

소설 제목은 ‘바닷가재 555’(찬섬출판사). 일제 식민시대와 해방, 전쟁으로 이어지는 길고 어두운 역사의 터널을 지나면서 중국과 러시아,북한을 떠돌지만 진정한 자아를 찾지 못한 채 가혹한 운명에 휘둘리는 한 인간의 삶을 그린 소설이다. 원제는‘피의 수레바퀴’. 상트 페테르부르크 러시아 국립사범대학 유학시절 작가와 친분을 맺은 홍기순(홍기순) 선문대 교수가 최근 번역을 끝내 총 3권으로 출간했다. 이 책은 98년 현지에서 출판됐다.

소설의 주인공 블라지슬라프는 저자 블라지미르와 마찬가지로 하얼빈에서 태어난 러시아 고려인 3세. 2차 세계대전 중 중국을 점령한 일본군에 의해 아버지를 잃은 열두살 소년 블라지슬라프는 그를 눈여겨 본 일본군 장교의 아들로 입양돼 일본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한다. 독일로부터 핵무기 관련 정보를 넘겨받는 극비임무를 띠고 스페인에 급파된 주인공은 총격전 끝에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지만,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부산으로 탈출한다. 일본군의 추격망을 뚫고 러시아로 잠입, 러시아 여인과 사랑에 빠지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추격전, 국경을 넘나드는 국제 스파이전, 국가와 이념 앞에 무력한 개인의 운명, 중간중간 펼쳐지는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를 속도감 있는 스토리 전개와 탄탄한 구성으로 이어간다. 책 제목 ‘바닷가재 555’는 주인공의 임무를 지원할 해외공작원을 지칭하는 암호명에서 따왔다.

홍 교수는 “외모와 핏줄은 한국인이면서 한국말은 전혀 못하는 주인공의 정체성 혼란이 소설 속에 잘 표현돼 있다”고 말했다. 저자도 서문에서 “역사적인 이유로 해외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들의 자기존재에 대한 의미를 되새겨 보려고 했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오래 전부터 ‘나는 과연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던졌다”면서“한국인도 러시아인도 아닌 우리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죽지 않기 위해서 ‘어떤 강변으로 기항해야 하는가’라는 고통스러운 질문에 대답하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저자는 5월말쯤 방한 예정이다.

/승인배기자 jane@chosun.com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