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렵의 우리들 삶이 이런 모습이었던가? 그렇다, 분명히 이런 모습이었다. 나는 6·25 나던 그 해에 19세였으니까, 모든 걸 선연하게 기억한다. 마치 오늘 아프리카 대륙의 에티오피아 같은 나라에서나 벌어지는 정경이, 당시 전시(전시) 중의 우리 나라에서도 곳곳에 벌어지고 있었던 것은 틀림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당혹감, 그리고 이 충격의 정체는 과연 뭘까?

그 당대를 속속들이 살아 보았던 사람으로서 새삼 장담하거니와, 아무리 전시라곤 하지만, 그 당시 우리 나라가 통틀어 죄다 이 사진에서 보이는 이런 기막힌 풍정 속에만 몽땅 떨어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부산 국제시장에서 호황(호황)을 즐기는 사람도 있었고, 남포동 술집들은 밤마다 들끓고, 부산 시청 앞 곳곳의 고급 음식점에서 비프스테이크를 자르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 사는 평상의 흐름은 어렵게일망정 견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사진 속에서 보이는 정경들이 그 당대 우리 삶의 일반적인 수준이나 정황, 그야말로 우리 국민 태반이 어느 끝머리에까지 이르렀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나만 하더라도, 월남 직후 부두노동을 할 때는 배고픔을 때워준 것이 길가에서 파는 군고구마였으니까. 그 군고구마를 어적어적 먹어대던 내 모습이 그 사진작가의 눈에 잡히지 않은 것은 나로서는 요행스러운 우연이었을 뿐이다.

그나저나 이 사진들을 들여다 보면서 나대로의 추억이 없지 않다. 나는 부두노동을 하다가 51년 7월 말에 트럭 운전사였던 먼 고향 아저씨의 소개로 동래온천장의 미군기관, 통칭 ‘재크’(정확한 명칭은 ‘주한 미 고문단사령부’였다) 부대에 경비원으로 취직을 했었는데, 어제까지 부두노동을 하던 사람으로서는 그야말로 천국이 따로 없을 정도로 대우가 좋았다.

이 기관은 본시 맥아더 사령부가 있는 일본 동경에 있다가 1951년 봄부터 동래온천장으로 옮겨 왔던 것이었다. 뒤에 알고 본 즉 무시무시하였다. 8240부대, 통칭 KLO 공작원들을 낙하산으로 북한 지역에 떨구는 업무를 총 관리하는 사령부로, 사령관은 제2차대전시 한눈을 잃었다는 미 해병대령이었다. 더러는 그 사령관실 앞에도 한밤 자정 시각에 카빈총을 메고 경비를 서기도 했다. 암튼 그 디미트리 브리아라는 사진작가도 그 당시 미 극동사령부 사진반에 소속되어 있었다면, 우리 나라에 있는 동안은 십중팔구 내가 근무하던 그 동래온천장의 ‘재크’에서 유숙을 했을 것이고, 어쩌다 지금 만나도 낯이 익을는지도 모르겠다.

끝으로, 이 사진들을 50년이 지난 지금 어떤 시각(시각)으로 보아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내 의견 짧게 한두마디.

첫째, 6·25 같은 전쟁은 결단코, 절대로,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겠다는 것.

둘째, 불과 스무날 남짓 앞으로 다가선 모처럼 열리는 남·북 정상회담에 이 사진들이 아무쪼록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었으면 싶은 것.

/이호철·소설가·경원대학교 초빙교수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