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고려말 충신 최영(崔瑩.1316-1388) 장군에 대해 '왜적과의 싸움에서 많은 공로를 세운 애국명장'이라며 높이 평가했다.

평양에서 발간되는 월간잡지 `금수강산' 최근호(2001.2)는 최영 장군이 '성격이 강직하고 의협심이 강하여 바른말을 거침없이 하였으며 `금덩이 보기를 돌조각같이 하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명심하고 언제나 생활을 검소하게 하였다'면서 그의 일생을 자세히 소개했다.

금수강산은 그의 출생과 관련, '개경(개성)의 양반가정에서 태어났다'고 보도해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그가 태어난 곳은 충남 홍성군 홍복면 노은리이고 현재 홍성군에서 생가 복원 및 사당 성역화 작업을 추진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조를 보였다.

잡지는 그가 살았던 14세기 중반기는 '고려의 대외정세가 가장 복잡했던 시기'였다며 북쪽에서는 명나라와 원나라가 세력다툼을 벌이고 그 틈을 타 여진이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남쪽에서는 왜구가 끊임없이 노략질을 감행했다고 지적했다.

홍건적이 침입했던 1361년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였던 그는 여러 장수들과 서경전투를 비롯한 수많은 전투를 능숙하게 지휘해 적을 물리치는데 크게 기여했으며 1364년 1월에는 고려군을 총지휘하여 서북쪽으로 쳐들어 오는 1만명의 외적을 격파했다고 잡지는 밝혔다.

그는 또 1373년 10월 `6도도순찰사'로 임명되어 왜국의 침입을 막기위한 수군(水軍)건설에 주력했으며 1374년에는 `도통사'로서 2만5천명의 군대와 300여척의 함선을 거느리고 원나라세력의 마지막 지탱점인 제주도에 원정, 적들을 완전히 소탕했다고 소개했다.

특히 환갑에 이른 노구를 이끌고 1376년의 홍산(부여군)전투와 1378년의 개풍군 전투를 직접 지휘했으며 1388년 초에는 `문하시중'이라는 최고관직에 올랐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최영장군은 '이성계와 그 일당에 의해 처음에는 귀양갔다가 얼마후에 처형당했다'면서 사형장에 가서도 그는 안색을 변하지 않았으며 그가 처형되던 날 개경사람들은 장사를 그만두고 모두 슬퍼하였다고 전했다.

잡지는 최영장군이 전투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비결의 하나로 '군대안에 강한 규율을 세우고 상벌을 엄격히 적용한 것'을 꼽았다.

한편 북한 과학백과사전출판사에서 펴낸 `백과전서'(1982년판)도 최영에 대해 '고려말에 외적의 침입을 막고 나라를 지키기위하여 용감히 싸운 무장이며 대관료'라고 소개했다./연합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