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실학사상을 대표하는 다산 정약용의 대표적 저서인 목민심서(牧民心書)가 북한에서 엄청난 정치적 소용돌이에 휩싸이며 "금서1호"로 낙인됐다고 한다면 의외일까.

목민심서가 정치적인 화두로 떠오른 것은 1960년대 중반 ‘갑산파 숙청사건’의 언저리에서다. 박금철·이효순으로 대표되는 갑산파는 1930년대 말 김일성의 빨치산부대와 연계를 맺었던 인연으로 해방 후 권력핵심에 진입했고 60년대 들어서는 당중앙위원회 부위원장에까지 오르는 등 상당한 지위와 권한을 누렸다.

그러나 이들은 67년 5월 초 열린 당중앙위원회 제4기15차 전원회의에서 ‘반당종파분자’의 오명을 쓰고 숙청돼 버렸다. 당시 갑산파 숙청를 주도했던 인물은 김정일로 알려져 있는데 이때 그는 당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 중앙기관담당 책임지도원이었다.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이들이 숙청된 사유 가운데 하나는 "민족적인 것을 살리고 주체를 세운다"는 구실아래 봉건유교사상을 설교했다는 것이었다. 구체적인 실례로 다산의 "목민심서"를 간부들의 필독문헌으로 지정, 각급 당조직에 하달한 것이 문제가 됐다.

일찍이 김일성은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유산 가운데 애국주의사상으로 교양하는데 좋은 자료들이 적지 않다면서 "춘향전"과 "심청전"같은 문학작품을 예시한 바 있었다. 또한 사상사업에서 주체확립을 강조한 55년 12월의 선전선동일꾼대회 연설에서는 박창옥 등 일부 간부들이 사대주의에 젖어 박연암과 정다산 등 선진학자, 작가들의 우수한 작품을 외면했다고 힐난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북한에서 "주체"가 강조되기 시작했고 전통문화의 가치와 의미를 새롭게 평가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는데 실학도 그중 하나였다. 북한이 박지원 정약용 이익 김정희 등 실학자들의 생몰일에 즈음해 기념·추모행사를 개최하고 이들의 저작을 국역, 편찬하는 사업을 벌인 것도 그 일환이었다. 문제의 목민심서도 1962년 과학원출판사에서 번역본으로 출판됐다.

그런데 정치적 이해관계가 엇갈리자 전통문화를 되살리려 한 노력들을 ‘반당종파행위’로 규정해 그 주역들을 일거에 숙청해 버린 것이다. 갑산파 숙청과 함께 목민심서는 금서의 대명사가 돼 버렸고, 이미 배포됐던 책들은 전면 회수돼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북한은 80년대 들어 목민심서를 비롯한 출판물에 대한 통제를 다소 완화해 인민대학습당 등에서 제한적으로 열람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광인기자 kk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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