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의 역군임을 자임해온 김대중 대통령은 오는 6월 12일 평양에서 북한의 지도층에게 자신은 “조급한 통일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설득해야 할 묘한 입장에 처했다. 애당초 정상회담이 김 대통령의 공존논리를 북한이 신뢰하면서 가능해진 것을 감안한다면 정상회담에서는 통일논의는 배제될 수밖에 없다.

북한 지도층에게는 남쪽이 거론하는 통일은 남쪽에 의한 흡수통일로 이해된다. 마찬가지로 북한이 말하는 통일은 내용상으로는 ‘북한에 의한 통일’뿐이다. 따라서 서로 개념과 수용태세가 완전히 정반대인 통일을 논한다는 것은 대화를 하지 말자는 말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그렇다면 김 대통령은 무엇을 말해야 하나. 김 대통령은 통일 대신 ‘우호적 분단’을 얘기해야 한다. 이제까지의 적대적 분단에서 우호적 분단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역설해야 한다. 일부 인사들은 그것을 ‘반통일’이라고 매도하겠지만 지금 한반도에서 지고(지고)의 가치는 평화이고 공존이고 대화이고 화해라는 것을 김 대통령은 만천하에 천명해야 한다.

북한을 향해서 뿐만이 아니라 우리를 향해서도 실천력없는 통일논의는 공허하다는 것을 일깨워야 한다. 남쪽의 원망(원망)만을 안고 남쪽의 국민을 대표해서 대변하고 북한 땅을 찾는 남쪽 대통령으로서 지녀야 할 1차적 책무는 남쪽의 이익을 보호하는 데 있다. 어찌보면 북한에 관한 것은 2차적이다. 김 대통령의 평양방문은 남쪽을 튼튼히 하고 남쪽 사람들을 안도하게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그는 남쪽이 흔들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김 대통령의 평양행(행)이 발표된 후 우리사회에는 심리적으로 여러 가지 이완현상이 생기고 있다. 이제 곧 통일이 온다든가, 평화가 금세 정착되고 북한특수가 벌어진다거나 하는 등의 성급한 기대가 우리에게 이념적 체제적 안전판을 소홀히 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해서는 안된다. 실행력없는 통일논의로 우리가 무장해제돼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평양을 방문하는 김 대통령은 한국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기존의 틀을 깨는 어떤 행동이나 발언도 신중해야 한다.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곧바로 남쪽의 법과 질서, 이념과 체제를 교란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남북대화는 국민의 관심사이고 남북정상의 만남은 국민의 감동이지만 그것을 수행하는 지도자에게는 냉혹한 비즈니스이고 업무의 수행이라는 인식이 절대로 필요하다. 다시말해 김 대통령은 필요 이상의 감회나 감상에 젖어서는 안된다. 냉정한 머리와 계산된 몸가짐으로 범접못할 권위를 지키며 동시에 흐트러지지 않는 단호함을 보여야 한다.

그 연장선상에서 북한과 북한지도층을 과소평가하는 것도 금물이다. 흔히들 국내외 인사들은, 때로 김 대통령 자신도 남쪽이 여러 면에서 우월하고 우세하기 때문에 북한을 경계할 필요는 없다는 논지를 쉽게 펴왔다. 흔히 한국은 강하고 북한은 약하기 때문에 걱정할 것 없다는 것이다. 서방의 ‘합리적 잣대’로라면 북한은 벌써 망했어야 했다. 수백만명을 기아의 공포에 몰아넣고 경제는 마비된 상태에서 백만대군을 유지하는 나라가 도대체 어떻게 연명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북한은 ‘신비하게도’ 그것을 버텨내고 있다. 극복하는 정도가 아니라 미국이나 일본 같은 강대국과 일대일의 거래를 만들어내고 서방의 여러 지도국들과 외교적 교섭을 벌이고 있다.

김정일이 김 대통령의 평가대로 ‘사려깊고 분별력 있는 지도자’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그가 ‘끈질기고 집착이 강한 지배자’임은 분명한 것 같다. 김 대통령은 북한 지도층을 허술히 보거나 “나를 좋아하겠지. . . ”하며 낙관적으로 임해서는 안된다. 산전수전 다 겪은 김 대통령의 정치역정과 경험이 김정일에게 안다리 걸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들 하지만 상대방을 경계하며 대하는 자세는 북한뿐 아니라 언제건 어디서건 필요하다. 거듭 부탁하지만 그는 남북정상회담을 여는 평화의 역군이기에 앞서 남쪽의 ‘대표선수’라는 기본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김 대 중 본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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