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경제는 당초 예상보다 훨씬 빨리 위기의 수렁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근본적인 구조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아 대외 경제환경과 경기변동에 취약한 문제점도 드러나고 있다. 선거의 해가 오기 전까지 구조조정을 마무리짓지 못할 경우 멕시코처럼 위기재발은 필연이라는 지적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구조조정은 왜 부진한지, 금융·기업 부문을 중심으로 한 2단계 구조조정의 과제와 현안은 무엇인지를 점검해본다.

/편집자

외환위기 다음해인 지난 98년 9월 대표적인 시중은행인 상업은행과 조흥은행의 주가는 주당 515원과 510원이었다. 정부가 11조원이 넘는 세금을 쏟아부어가면서 6개월간 금융구조조정을 추진하자 주가는 9000~1만4000원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다시 1년이 지난 지금 주가는 다시 액면가에도 크게 미치지 못하는 2000원 이하로 주저앉았다.

금융전문가들은 “시장이 금융구조조정의 성과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최근 정부가 공적자금 지원대상 기관에서 제외하면서 촉발된 현대투신 파동은 국내 금융시장이 얼마나 부실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불안감이 시장을 휩쓸면서 서울 증시가 이틀간 폭락했고, 재정경제부·금융감독위원회와 함께 현대그룹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의 독일인 부행장까지 긴급 진화작업에 동원돼야 했다.

지난 98년 이후 정부가 64조원의 공적자금을 쏟아 부어가며 금융구조조정을 진행해왔지만 그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막대한 금융부실이 아직 청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작년 말 현재 전체 금융권의 부실채권은 66조7000억원, 전체 여신의 11.3%에 이른다.

그러나 실제 부실규모는 이를 훨씬 능가한다. 이번에 문제가 된 투신권 부실과 은행들이 자체 추산한 부실채권의 일부가 빠져 있기 때문. 이를 포함하면 금융기관의 총부실은 80조원을 훨씬 넘어선다고 전문가들은 추정한다. 100조원을 넘어 계속 증가세를 나타내고 있는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 기업들에 대한 여신도 은행들의 목줄을 죄고 있다.

정부는 지난해 대우사태의 와중에서도 은행권 구조조정을 그럭저럭 진척시켰다. 그러나 은행권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태였던 투신에는 손을 댈 엄두를 내지 못한 채 미봉책으로 일관했다. 특히 지난해 대우 채권 관련 수익증권 환매사태가 터지자 일시적인 시장 안정을 위해 개인투자자들에게 환매비율을 최고 95%까지 보장해줌으로써 투신권 부실을 더 심화하는 결과를 빚었다.

구조조정이 어느 정도 진행된 시중은행으로 눈을 돌려보자. 경쟁력을 갖추었는가라는 물음에 전문가들의 대답은 부정적이다.

지난해 목표수익률 연 10~15%를 내걸며 판매했던 성장형 단위금전신탁 상품에서 배당은커녕 원금도 다 돌려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 국내 은행들의 ‘실력’이다. 남북 정상회담 계획이 발표되자 너도나도 북한 지점개설 추진 계획을 발표하고, 자금을 제대로 운용할 데도 없으면서 금리를 올리며 수신경쟁을 벌이는 등 시중은행들의 행태는 외환위기전과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HSBC 서울지점은 지난 3일부터 연리 8.5%의 주택담보대출 상품을 내놓았다. 국내 시중은행보다 1% 포인트 가량 금리가 낮은 데다 주택근저당 설정 등에 드는 비용을 면제해주고 종합재산보험도 무료로 들어준다. 발표 직후 하루 수천통씩의 전화가 쇄도하고 있다. 싸게 빌린 자금을 저금리에 대출할 수 있는 별도계정 방식의 정교한 자금조달·운용체계를 갖춘 것이 성공의 비결이다. 조달자금을 몽땅 한 항아리에 넣어서 조달금리를 평준화하는 국내은행의 주먹구구식 자금 운용과는 큰 차이가 난다. 존 블랜손 지점장은 “연내에 서울지역 영업점 수를 배로 늘릴 것”이라고 자신감을 표시했다.

정부는 하드웨어적 구조조정은 완결됐고, 이제부터는 소프트웨어적 개혁이 추진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하드웨어 개혁조차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은행을 합병하면 은행마다 연간 200억~300억원에 달하는 전산투자비를 줄일 수 있다. ”(한은 김두경 은행팀장)

하지만 은행들은 자발적인 합병을 꺼리고 있다. 합병은 조직 축소와 감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결국 정부가 중매쟁이 노릇을 해야 하지만 공적자금이 거의 고갈된 상태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지도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98년에 이은 2차 금융구조조정의 진전을 기대하기는 어렵고, 결국 다시 금융부문의 부실 누적과 그에 따른 위기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지금이 구조조정을 위한 마지막 기회다. 금융개혁이 가장 시급한 과제이다. ” (이윤호 LG경제연구원장)

/김기천기자 kckim@chosun.com

/김기훈기자 khkim@chosun.com

금융권별 부실 채권 현황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