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4월. 평양에서는 천정부지로 치솟던 남한드라마와 외국영화 DVD·비디오 테이프 가격이 뚝 떨어졌다. 개당 2000원을 넘던 것이 100원대로 폭락했다.

북한당국의 포고령 때문이다. “남한영화 보는 자, 비디오기기(VTR)를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관계기관에 등록하지 않은 자를 엄단한다”는 내용이었다. ‘북한판 한류’였던 한국 영화·연속극 열풍은 겉으로는 급속히 식었다. 실제로는 지하로 숨어들었다.

작년 여름 탈북한 이명호(가명)씨는 한국과 외국 영화가 2002년부터 밀려들었다고 했다. 밤만 되면 친구·가족이 모여 남조선 영화보는 재미에 푹 빠졌다고 했다.

‘용의 눈물’ ‘태조 왕건’ 등 사극부터 서울에서 유행했던 ‘장군의 아들’ ‘가을동화’ ‘겨울연가’ ‘모래시계’도 인기를 끌었다.

‘007시리즈’ ‘타이타닉’ 홍콩무술영화 등도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DVD와 비디오 테이프가 워낙 인기를 모으자 이것들을 대량 복사해 파는 장사꾼들도 늘어났다.

이씨는 “배전부에 뇌물을 줘가면서 전기를 공급받아 밤을 패면서(새우면서) 남한 연속극을 본 적도 있다”고 했다. 처음 보는 서울거리, 애틋한 연애감정, 미묘한 삼각관계 등 모든 것이 생소한 북한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평양 출신의 한 고위층 탈북자는 “90년대 중반 이후에는 특히 한국 연속극이 많이 나돌고 있다”고 했다. ‘이브의 모든 것’에서부터 ‘올인’ ‘대장금’ 등 최근 남한의 연속극도 빠르게 북한 사회에 전파됐다고 한다.

이런 여파로 젊은이들 사이에 서울말도 유행하고, 한국산 옷이 시장에서 최고가에 팔리기도 한다. “몸은 평양에 마음은 서울에 있다”는 우스갯말이 돌아다닐 정도다.

북한과 같은 통제사회에서 이런 일들이 당국의 눈에 띄지 않을 리가 없다. 그래서 2003년 말부터는 국가안전보위부의 제1과제가 한국 영상물 단속으로 바뀌었다.

아예 소지자를 체포, 구금하거나 지방으로 추방하기도 했다. 때로는 값비싼 테이프의 경우 보위부 요원들이 빼돌려 시장에 되팔기도 했다. 단속을 하다가 한편 두편 보기 시작한 남한 비디오 테이프로 이제는 자신이 매니아가 되는 경우도 있다.

마치 마약과 같아서 쉽게 끊을 수 없다는 얘기도 공공연해졌다. 이제 한국 영상물 열기를 뿌리뽑기는 어려운 지경이 된 것 아니냐는 것이 탈북자들의 지적이다. 지금도 인기 있는 영상물은 북·중 국경을 통해 북한으로 흘러들고 있다.
/강철환기자 nkch@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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