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4월 23일자 조선일보 이메일클럽 [NK리포트]로 보내졌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이교관기자입니다.

언제 찾아 왔던가 싶던 봄이 하마 벌써 저만치 가고 있습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이처럼 봄이 왔다 가는 등 자연의 사계(四季)는 어김없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21세기에 접어 든 지금도 한반도에 반복되는 정치경제적 의미의 계절은 여전히 '이계(二季)'가 아닌가 싶습니다. 겨울이 지나 봄으로 접어든 듯싶으면 또 다시 겨울처럼 추운 날씨가 계속되는, 말하자면 이상한 계절, 이 두 가지 계절만이 존재하는 게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북 정상회담 이후 한반도, 즉 남북 관계를 지나가는 계절을 묘사하는 데 '봄은 아직 저 잔설 밖에나 있을 뿐 여기는 아직 봄이 아니다'는 의미의 춘생잔설외(春生殘雪外)란 어느 옛 시구보다 적절한 표현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한반도가 기다리는 ‘봄’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좌파나 친북 세력을 제외하고 누구도 그 답은 북한이 대남혁명전략을 폐기하고 수백만명의 아사자를 초래한 저급한 생산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자유시장경제 체제를 도입, 진정으로 남한과 평화공존을 하는 것이라는 데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군사적으로 치열하게 대치하고 있는, 체제가 서로 다른 두 국가 간에 있어서 통일이란 어느 일방이 자연적으로 해체되거나 붕괴할 때, 또는 어느 일방이 타방을 제압할 때나 가능합니다. 때문에 지금 당장 통일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전쟁 또는 그에 준하는 비극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통해 체제가 다른 두 국가가 합의로 궁극적인 통일을 이룬 사례가 없다는 점에서 한반도에 요청되는 봄의 정체는 평화공존이라는 데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북 평화공존이란 이름의 ‘한반도의 봄’을 앞당기기 위한 전제 조건은 남한이 흡수 통일 전략을 폐기한 만큼 북한도 대남혁명 전략을 폐기하고 상호 체제를 인정하고 군사적 긴장을 없애는 것입니다. 문제는 남북한이 상호 체제를 인정하기로 하고 서로에 대한 붕괴 전략을 폐기하더라도 경제력 차이가 심각할 경우 경제력이 뒤지는 어느 일방은 늘 흡수 통일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타방을 경계하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남북 평화공존을 위해선 북한이 대남혁명전략을 폐기하는 것과 동시에 시장경제 체제를 도입해 생산력을 향상시키는 것이 요청되는 것입니다. 김대중 정부의 주장대로 남북 정상회담 이후 북한이 변하고 있다면 그 것이 이런 방향이 맞는지가 주목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반드시 짚어 보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지난 1월 15일 중국 상하이 푸동지구를 방문, 이 곳 첨단 산업과 증시를 견학하고 돌아가자 국내외에서 제기되고 있는, 북한이 중국식 개혁ㆍ개방 모델을 수용할지도 모른다는 전망이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이 전망이 김대중 정부에 의해 ‘신화’처럼 부풀려지자 그동안 많은 전문가들이 그 허구성을 파헤치는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그 결과 북한으로선, 완전한 시장경제 체제는 아니더라도 중국처럼 적어도 자본과 임노동 관계를 인정하는 선까지 개방할 경우 수령유일지배 체제라는 정치 체제에 위협이 될까 우려해 중국식 모델을 수용하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부정적인 전망은 좀 더 정치하게 다듬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기 위해선 역시 1979년의 중국과 2001년의 북한을 비교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입니다. 다시 말해서 등소평이 오늘날의 중국을 있게 한 개혁ㆍ개방 정책을 펴기 시작한 1979년 당시의 중국과 김정일 위원장이 그 같은 개혁ㆍ개방의 필요성을 고민하는 2001년의 북한은 국내외 조건에서 어떤 점이 다르고 같은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북한이 과연 중국식 개혁ㆍ개방 모델을 수용할 가능성이 있다면 왜 그런지와 안 한다면 왜 하지 않을 것인지가 좀 더 구체적 차원에서 분석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들 수 있는 차이는 중국의 개혁ㆍ개방은 치열한 노선 투쟁의 산물이었던 반면 북한에선 개혁ㆍ개방을 둘러싸고 그같은 투쟁이 없다는 것입니다. 1979년 중국에선 시장경제적 요소를 도입하는 경제 개혁을 오랫동안 열망해 왔던 등소평 세력과 문화혁명을 통해 극좌적 이데올로기를 고집해 온 모택동의 후계자인 화국봉 세력이 치열한 노선 투쟁을 벌였고 그 결과 등소평 세력이 승리해 시장경제로의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2001년 현재 북한에선 문화혁명 때 숙청 당했다가 복권된 등소평과 같은 개혁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정책 결정 과정이 다르다는 것을 꼽을 수 있습니다. 1979년 중국의 경우 집단지도체제였습니다. 물론 등소평이 최고 권력자이긴 했지만 그는 군사위 주임직 등만 맡고 국가주석직과 공산당 총서기 직은 맡지 않고 개혁 세력의 균형자 역할을 수행하는 등 당시 중국의 정책 결정 과정은 1인 지배 체제가 아니라 집단지도체제였다는 것입니다. 반면 2001년 현재 북한은 김정일 1인 지배체제입니다.

물론 김정일은 노동당 총비서직과 국방위원장직만 맡고 내각 총리와 대외적인 국가수반격인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직은 각각 홍성남과 김영남이 맡는 등 형식적으로 집단지도체제인 양 보입니다. 그러나 북한은 당 중심 체제이고 당은 수령의 영도를 받는다는 점에서 명실상부한 김정일 1인 지배 체제인 것입니다. 때문에 북한 내부에서 개혁ㆍ개방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세력이 있다고 해도 감히 김정일의 권위에 도전할 수 없는 구조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들 수 있는 차이는 지도 이념과 정책 노선 결정에서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이데올로기 해석권과 관련해 등소평은 상대적 자율성만 가지고 있었던 반면 김정일은 절대적 자율성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등소평이 당시까지만 해도 절대적 권위를 지니고 있던 모택동의 극좌적 사상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면서 경제 개혁을 위한 이론적 틀인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에 이어 '사회주의경제론'을 만들어내야 했던 것도 국가 이데올로기에 대한 해석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즉, 절대 권력이 없던 등소평 등 개혁 세력으로선 우회적인 방법으로 지도 이념과 정책 노선을 수정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김정일로서는 등소평처럼 구차하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절대 권력자이기 때문에 주체사상이란 국가 이데올로기에 대한 해석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차이는 역설적으로 김정일이 마음만 먹으면 중국처럼 우회적인 방법을 쓰지 않고 곧장 시장경제로의 개혁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네 번째 차이는 종심(縱心)이 중국은 길고 북한은 짧다는 것입니다. 중국이 1979년 개혁ㆍ개방 정책 채택 이후 1980년대 중반 심천 지역을 경제 특구로 삼았던 것은 홍콩이란 선진 자본주의 시장이 가까워 인접 효과를 내려는 데 그 목적이 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특구 실험이 실패했을 경우 그 영향이 중국 내부 지역으로의 파급이 힘들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종심이 짧아 심천같은 지역을 찾기 힘든 상황입니다. 그래서 북한이 중국처럼 비교적 안심하고 본격적인 특구 개방 정책을 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국제 환경적 차이입니다. 1979년 당시 중국은 이미 경제 개혁의 성공에 더 없이 중요한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 이루어진 상황이었던 반면 2001년 현재 북한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당시 고도성장 중이던 대만이 선진국들과 무역 마찰을 빚고 있었던 것도 중국에 유리한 조건이었습니다. 즉 대만 자본을 비롯한 화교 자본이 대거 중국으로 이동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의 경우 화교 자본처럼 대규모 투자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의 자본을 투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던 남한 기업들이 1997년 IMF 사태로 인해 그같은 능력을 상당히 훼손되는 등 불운한 상황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상에서 살펴 본 '1979년과 2001년의 5가지 차이'는 북한이 중국처럼 시장경제로의 개혁ㆍ개방을 가능하게 만든다기보다 어렵게 만든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잔설(殘雪)을 넘어 봄이 남북 관계에 찾아오기란 쉽지 않은 것입니다. 물론 북한의 대남 전략을 규정하고 있는 노동당 당규약에 대남혁명전략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점에서 어쩌면 그 봄은 ‘고도(Godot)’인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가는 봄이 아쉬운 탓에 봄 끝 무렵에 봄타령으로 일관했음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이교관 기자 드림 haeda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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