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로선 남조선 정치지도자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인물은 반공연맹 의장 장택상이다.”4·19 직후 김일성은 이승만 대통령 후계자로 장택상을 꼽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한국역사연구회 4월민중항쟁연구반이 4·19 혁명 41주년을 맞아 최근 펴낸 연구서 ‘4·19와 남북관계’(민연)에 실린 논문 ‘4월민중항쟁시기 북한의 남한정세 분석과 통일정책의 변화’에 실린 내용이다.

가톨릭대 국사학과 한모니카씨는 러시아 외무부 문서보관소에서 찾아낸 당시 평양주재 러시아 대사 '푸자노프 비망록’을 처음으로 활용, 이같은 내용을 공개했다.

한씨는 이외에도 당시 평양 주재 러시아 대사관 외교관과 북한 정권 고위간부들이 나눈 대화를 기록한 ‘대담록’ 등 러시아 사료를 동원, 4·19가 북한의 통일정책에 미친 영향을 분석했다.

한씨 논문에는 1960년 8월 김일성이 제안한 ‘과도적 연방제’가 갑작스럽게 나온 것이 아니라 1950년대 중반 소련 후르시초프 서기장 집권 이후 소련측에서 먼저 ‘평화공존론’에 입각한 연방제를 제안했다는 사실도 담겨 있다.

당시 소련은 1956년부터 ‘평화공존론’을 내세워 한반도에 두 나라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두 나라를 점진적으로 접근시켜 ‘양국 연방’ 형태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나가야한다고 생각했다는 것.

북한은 1950년대 후반 독일식 연방안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으나, 소련식의 양국연방제는 반대했다. 4·19 이후 김일성은 남북간에 활발한 경제·문화교류와 신뢰회복을 강조하는 ‘과도적 연방제’를 제안한다.

학생시위에 의한 정권 전복이란 엄청난 대중운동 역량을 확인한 후, 일방적인 무력통일노선에서 방향을 선회했다는 것이다. 북한은 1970년대중반 이후에는 과도적 연방제안을 고려민주연방제로 구체화했고, 1980년 다시 고려민주연방국 창립방안으로 발전시켰다.

그전까지 무력통일노선을 고집하던 북한의 통일정책이 연방제로 선회하게 된 것은 4·19의 영향이었다는 것이다.

모두 6편의 논문이 수록된 이 책은 4·19를 민주화·민족 운동으로 규정하는 것에 벗어나 38선 넘어 북쪽까지 영역을 확대, 4·19의 의미를 해석한다는 점에서 기존 연구의 틀을 뛰어넘는다.
/김기철기자 kichul@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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