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시 보통강구역 낙원거리 조선고려약기술센터. 1992년 창설된 한방 과학기술연구기지의 하나다.
북한사람들중 허준과 동의보감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고려의학(동의학)의 중요성은 매우 강조된다. 서양의학에 대한 대체의학이 아니라 의료의 한 기둥으로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남한에서 ‘한(漢)의학’이라고 부르다가 90년대 들어 ‘한(韓)의학’으로 바꿔 전통의학을 자부하게 됐지만, 북한에서는 일찍부터 이 점을 강조해 동(東)의학이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90년대 들어 중국의학의 상대적 개념인 동의학 대신 고려의 정통성을 강조해 고려의학이라고 부르고 있다.
"고려의학과 서양의학의 배합과 협진(協診)"이라는 아이디어는 북한이 초기부터 주창해온 주체의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서양의학(신의학) 못지 않게 동의학을 발전시키기 위한 각고의 노력이 기울여져 왔다. 요즘처럼 외화난으로 외국으로부터의 약품이나 기기 수입이 힘들어진 상황에서 동의학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신의학보다 돈이 적게 들고 또 자연에서 재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전쟁 등 유사시에 쉽게 대처할 수 있다는 강점도 있다.
고려의학은 주민들의 삶과 아주 가까이 있다. 지방의 각 시군마다 "생약 관리소"가 있어 주민들이 산에서 채취한 약초를 수매한다. 거둬들인 동약재들을 법제(法製:채취한 한약을 약품으로 쓸 수 있게 처리하는 과정)하여 읍내에 있는 제약공장들에 보낸다. 여기서 한약엑기스제를 생산하여 군병원과 리병원, 리진료소 등에서 필요한 약품을 댄다. 군단위의 제약공장에서는 양약제제보다 생약제제를 더 많이 생산한다고 할 수 있다. 간질환에는 인진고, 심순환기질환에는 영사(靈砂ㆍ수은을 고아서 만든 약재)가 든 영사환등을 쓴다. 노인들을 위해서는 음양곽 엑기스제 등을 생산한다.
이런 생약제제들을 생산하기 위해 북한의 의사들과 의과대학생들은 누구든지 약초캐기에 나서야 한다. 봄 가을이면 북한은 사무직원까지 모든 주민이 농촌활동에 나서게 되는데, 의대생들은 대신 약초재배와 약초채취에 동원된다. 양강도 혜산에 있는 혜산의대생들은 삼수군의 약초재배농장에 나가 민박집을 정해 놓고 한 달 보름에서 두달 이상 노력동원을 하는 식이다. 양의들도 약초캐기에는 예외일 수 없다. 병원앞 화단에도 약초가 심어져 있다. 구기자 천궁 당귀 박하 도라지 익모초 등 팻말도 일일이 붙어있다. 의사들은 휴진이 있는 날이나 휴일에 여기서 약초를 가꾸거나 채취한다.
양방병원에도 동의과가 따로 있다. 양방으로 고치지 못할 질환은 동의과에서 맡아 진료한다. 일반 양방의사라 할지라도 간단한 침구혈 자리는 알고 있어 전쟁과 같은 유사시에는 손발가락에 있는 십선혈을 따주거나 4총혈 등에 침을 놓을 수 있게 미리 준비한다. ‘동서협진’이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평양을 제외한 지방의 의료시설은 대단히 열악하다. 리 단위까지 진료소가 있긴 하지만 경제 악화와 함께 의료서비스의 질도 같이 낮아진 것이다. 동약국과 신약국이 따로 있어 어렵지 않게 약을 구하던 시대도 80년대초에 끝났다. 그래서 집집마다 비상약품을 구비해 두어야 하는데 이 역시 "전쟁"에 대비한다는 차원에서도 필수적이다.
남한에서 정로환이나 우황청심환이 유명하듯 북한사람에게는 영신환, 건위정 등이 소화제의 대명사처럼 돼 있고, 꼭 갖추어야 할 비상약품이다. 아스피린, 테라미찐, 페니실린 등도 구비해 둔다. 다만 요즘처럼 비상식량도 구비해 두기 힘든 북한상황에서 비상약품이라고 제대로 갖추고 살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이충국(33·북한 리과대학 중퇴·경희대 한의학과 본과 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