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개수로건설에 동원된 청년돌격대원들. 돌격대원들에게는 아무리 거친노동이라도 남녀구분이 없다.
북한에서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거나 군에 입대하지 않은 젊은이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건설장에 동원돼 돌격대생활을 경험하게 된다. 젊은이들 특히 젊은 여성들이 가장 기피하는 것은 돌격대원으로 뽑히는 것이다. 돌격대는 남녀 비율이 6:4 정도여서 다른 곳에 비해 여성들이 많다.


◇평양-남포 고속도로건설에 동원한 여성돌격대원들. 이들은 남자들과 똑같이 온갖 험한노동에 참여한다.
사람들은 돌격대야말로 남녀평등이 가장 잘 실현된 곳이라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망치를 휘두르고 마대에 흙을 담아 나르는 험한 노동도 여자라고 해서 절대 예외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남성을 능가하는 여성돌격대원들도 많다.

돌격대원들은 젊다는 이유 하나로 온갖 궂은 공사에 다 동원돼 힘든 노동을 하고 있다. 최근의 원산~금강산 철길공사나 평양~남포간 고속도로(청년영웅도로) 건설을 비롯해 북한에서 가장 힘들었던 북부철길공사(양강도 혜산~자강도 만포)도 청년돌격대원들이 총동원돼 만들어졌다. 이 밖에 평양 광복거리, 통일거리건설을 비롯한 평양시내의 대규모 건축물 공사와 전국의 발전소, 도로, 갑문 등 어렵고 힘든 공사에 돌격대원들의 피와 땀이 스며있지 않은 곳이 없다.

북한의 젊은이들은 고등중학교를 졸업하면 대학진학을 꿈꾸지만 여의치 않으면 대개 군에 입대한다. 여기서도 탈락한 젊은이들은 속도전청년돌격대에 차출된다. 젊은이들이 돌격대에 나가려고 하는 이유는 노동당에 입당할 수 있는 기회가 군사복무 다음으로 열려 있기 때문이다.

속도전청년돌격대는 청년동맹 중앙위원회에서 총괄하며 소속은 중앙과 지방으로 나뉜다. 중앙속도전돌격대는 12개 여단으로 편성돼 있으며 3만~5만명의 돌격대원들이 있다. 지방에는 도(도)마다 3000~7000명 정도씩 젊은이들이 대기하고 있으며 이들은 전국을 누비면서 공사장에 투입된다. 전국의 돌격대는 평상시에 7만~10만명정도 유지되고 있으며 대형공사가 있을 경우는 20만~30만 명까지 불어나기도 한다.

정규 돌격대는 군대식 편제에 따라 사단(여단)·연대·대대·중대·소대로 편성되며 각 단위의 책임자는 사단(여단)장, 연대장, 대대장 등으로 불린다. 대원들은 다시 군관(장교)과 일반 대원으로 구분되는데 지휘자는 군대 것과는 약간 다르지만 견장까지 단다. 가슴에는 김정일초상화 아래에 계급장을 붙이고 복장도 군복과 같은 짙은 녹색의 옷을 입는다. 모양은 군복과는 달리 인민복 형태이다.

정규 돌격대는 남자 30세, 여자 26세까지이며 복무기간은 평균 7~8년 정도. 제대시 인민군과 동등한 제대증을 준다. 대원인 경우 한달 급여는 80원, 군관(장교)은 120원 정도를 받는다. 일반 노동자의 한달 급여가 100원 안팎이니 평균수준은 되는 셈이다.

여성들은 결혼하면 돌격대에서 제대된다. 정규 돌격대 이외에 모자라는 인력은 각 공장, 기업소에서 큰 공사가 벌어질 때마다 수시로 뽑아오는데 이들은 교대로 1~2년정도씩 근무하고 직장으로 복귀한다.

군대와는 달리 젊은 남녀들이 섞여있는 돌격대 안에서 연애하거나 결혼에까지 이르는 커플도 꽤 많다. 이런 커플이 탄생할 때는 모든 돌격대원들의 축복속에 공사현장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책임자들은 각종 연애사건을 처리하는데 골머리를 앓는다.

한창 나이의 젊은이들이 수천명씩 모여있다 보니 온갖 사고가 속출하기도 한다. 남한노래도 여기서 가장 먼저 퍼진다. 돌격대의 유일한 재미거리인 오락회에서는 일부 젊은이들이 남한노래를 마구 부르다가 혼이 나는 사건도 심심찮게 발생한다. 오랜 돌격대생활을 경험한 한 탈북자는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생일날 동료들이 모두 모여 노래도 불러주고 함께 축하해 주었던 것이라고 기억했다.

돌격대는 출신성분에 걸려 군에도 못가고 대학에도 진학하지 못한 계층의 젊은이들이 많아 사회에 대한 불만이 가장 높은 집단이기도 하다. 각 지역에서 몰려온 젊은이들의 패거리 싸움도 심심찮게 일어난다. 또 최근엔 먹을 것이 부족해 민가를 마구 습격해 군대보다도 더 위험한 집단으로 주민들은 생각할 정도다. 북부철길 공사장에서는 돌격대원들이 배가 고파 전선을 잘라 중국에 팔아먹다가 체포돼 몇 명씩 공개 처형을 당하기도 했다.

/강철환기자 nkch@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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