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강철환 기자입니다.

북한 중앙TV에서 녹화실황중계한 가수 김연자의 공연을 보고 느낀 점이 많아 펜을 잡았습니다.

제가 고향땅을 버리고 남한으로 오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남한노래 때문이었습니다. 당국에서 포고령까지 붙이고 공개총살까지 하겠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죽음까지도 두렵지 않을 만큼 남한노래에 매료됐던 게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무모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1991년 어느날 함경북도 무산에 있는 고모네 집을 찾아가기 위해 고원역(함경남도 고원군)에 잠시 내린 적이 있었습니다. 어둠이 짙게 깔리기 시작했고 기차를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이 플랫폼에 모여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었는데 비교적 조용한 분위기 였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귀에 익은 휘파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자세히 듣기 시작했는데 얼마 안 있어 얼마나 흥분되고 가슴이 벅차 올랐는지 모릅니다.

맨 앞쪽에 옷을 깔끔하게 입은 잘생긴 20대 초반의 젊은이가 ‘옛 시인의 노래’를 멋진 휘파람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불과 며칠전에 친구들과 함께 이불을 뒤집어 쓰고 배운노래였기에 눈이 휘둥그레 졌지요. 노래가 너무 좋아 몇 번이고 불러 가사까지 이미 외우고 있던 노래였습니다. 동지를 만난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은 물론이었구요. 통성명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도 이 노래를 주위의 누구도 모를 줄 알고 휘파람을 불렀을 테니 참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후 이 사실을 친구들에게 알려줬고 더 용기를 내 남한노래를 본격적으로 라디오를 통해 녹음하고 친구들과 공유했습니다. ‘사랑의 미로’, ‘당신은 모르실거야’, ‘돌아와요 부산항에’ 등 20여곡의 남한노래를 나름대로 골라 기타곡으로도 익히고 노래도 불렀습니다.이미 널리 알려진 남한노래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남한노래를 부르는 것은 여전히 잘못 걸리면 최소한 수용소에 끌려가야 할 만큼 엄청난 범죄행위였습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오늘 평양방송에서는 남한의 가수가 평양시민들을 상대로 음악회를 가졌고 이 공연이 전국의 북한주민들에게 방영됐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김정일이 직접 그를 만나 사진까지 찍었습니다. 이례적으로 많은 시간을 할애해 그의 공연을 방영시킨 것은 분명 최고통치권자의 명령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마도 김정일의 기분이 무척이나 좋았던 모양입니다.

지금까지 남한가수들이 북한에 가서 노래를 불렀지만 특수신분의 주민들만 초대돼 들었을 뿐 전국의 주민이 간드러진 목소리의 남한가수 노래는 처음이였으리라 여겨집니다. 따라서 북한에서 살았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주민들이 이 공연을 보고 상당한 충격과 즐거움을 느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번 공연에서 김정일이 상당한 양보를 한 것만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가 부른 북한노래는 ‘도시처녀 시집와요’ ‘휘파람’ 등 사상성이 없는 노래였고 주로 남한노래를 열창했습니다. 홀로 아리랑, 하숙생, 황성옛터, 눈물 젖은 두만강, 칠갑산, 타향살이,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 김정일 위원장이 좋아했다는 소문이 있는 노래들을 연거푸 불러 여기서 지켜보는 저까지도 조금은 흥분될 정도였으니 북한주민이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겠는가에 대해서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의 무대 의상이나 현란한 몸동작 등은 북한가수들이 죽었다 깨어나도 흉내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북한가요 휘파람은 특유의 동작과 간드러진 목소리로 불렀는데 이 노래가 저렇게 부르면 참 들을만한 노래구나 하고 느껴졌습니다.

이 노래를 부른 전혜영이 북한사람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가수인데 그 순위가 바뀌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김연자가 부른 노래들은 남한에서도 인기 좋은 노래여서 아마 지금쯤이면 전국의 북한주민들이 이 노래를 배우기 위해 떠들썩했을 겁니다. 공개적으로 부른 남한노래이니 누가 단속할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니겠습니까?

단지 그가 한 발언 중에 “김정일 장군님의 점퍼와 구두는 남한에서 너무나 인기가 좋아 물건이 없을 정도”라느니 자기도 김정일 장군의 팬이라느니 하는 발언들은 어떻게 보면 기분 나쁘긴 하지만 이 말을 믿는 북한의 지식인들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단지 아무 실정 모르는 주민들이 ‘정말 그런가’하고 여길 우려가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늘 되풀이되는 그런 발언에 식상해 있는 주민들에게 별효과는 없다고 봅니다. 오히려 그가 부른 10여곡의 남한노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 노래들이 북한주민들에게 불려지고, 그래서 일반주민들도 남한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깰 수 있다는 생각이 더욱 강합니다. 그가 한 발언은 그 체제에서 남한 노래를 부르기 위한 최소한의 ‘비용’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번 김연자의 북한 공연을 보면서 아무리 변하지 않는 북한이지만 그래도 조금씩은 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상이나 우상화는 추호도 변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남한노래를 북한주민이 누구나 마음대로 부를 수 있는 세상이 온다면 북한당국은 안 변해도 일반주민들은 충분히 변할 수 있고 그만큼 남북이 가까워 질 수 있는 길이 마련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강철환기자 nkch@chosun.com

-이 글은 '이메일클럽 NK리포트'로도 보내집니다.-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