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의 만수대 대기념비군상의 혁명전통편 부분, 집단창작, 1972년 조각.


북한의 거리나 주요 건물의 실내외를 수놓은 미술은 조각품이나 벽화다.

북한이 조각미술을 얼마나 중요시하는가는 각종 기념비와 기념탑, 기념문, 능과 체육관 등에 놓여진 조각의 규모를 보면 가늠할 수 있다.

인체 크기의 서너 배부터 열 배 이상까지 웅대하고, 심각한 노력이 기울여져 있다. 공공조각이라 할 이런 사업은 북한의 "국립미술단" 격인 만수대창작사의 조각창작단이 수행한다.

대규모의 작업을 해낼 수 있도록 많은 인원이 뒷받침돼 체계가 잘 짜여져 있다. 그 종사자는 주요한 기간 산업을 취급하는 국가기업 임직원처럼 인식되고, 각별하게 대우받는다.

북한은 미술을 사회 통합에 기여하도록 조직한다. 자신들의 역사에 자부심을 지니도록 이를 충실히 반영한 것은 물론, 자신들이 이상으로 여기는 바를 공공장소와 건물 곳곳에 아로새겨 놓고 있음을 우리는 화보나 화면으로나마 잘 알 수 있다.

김정일 위원장이 현실 정치를 시작하여 처음 관여하여 이룬 사업이 미술분야임은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 다음이 영화 분야다.


◇평양 만수대 대기념비 중의 항일혁명투쟁탑 '보천보전투승리' 부분.


◇전영철의 다색목판화 '간석지 개척자들'. 1987년작.


우리에게 북한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천리마동상은 앞으로 전진하는 기상을 대담한 설계를 통해 표현했다. 백두산 기슭에 세워진 삼지연의 대기념비는 막대한 크기로 된 김일성의 동상을 중심으로 마치 연극처럼 조국편과 진군편 그리고 흠모편의 막으로 이루어진 것 같다.

평양 중심에 있는 만수대 대기념비도 비슷한 방식인데, 양쪽에 늘어선 항일혁명투쟁, 사회주의 혁명과 사회주의건설을 나타내는 깃발을 탑 삼아 덩어리지어 배열했다. 이런 것은 청동주조였는데, 혁명열사릉에서는 화강암을 이어 붙여서 군상이 마치 한 덩어리의 돌에서 빚어져 나오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이런 기법은 구소련을 비롯한 동유럽과 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꽤 많이 선보였다. 북한의 경우 낙관적이고 낭만주의적인 기운이 더하기 때문에 색다르고 웅장한 분위기를 느끼게 해준다.


◇'붉은 바위', 박은용 작, 1970년 판화, 121X59cm.


북한의 판화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분야다. 출판화의 일종인 판화는 중국이 혁명과정에서 널리 활용, 발달시킨 목판화운동에 영향받아 이루어졌다.

1970년경 높은 수준으로 올라선 듯한데, 평양의 조선미술박물관 소장품을 수록한 화집에 소개된 북한의 다색목판화는 높은 수준이고, 특히 1979년의 국가미술전람회에 출품된 다수의 판화들은 감탄을 자아낼 정도였다.

다색판화는 상당한 숙련과 용의주도함을 필요로 한다. 흔히 보는 채색한 판화와 질적으로 다른 노력이 요구된다.

우리 조상은 일찍이 활판 인쇄술을 발전시켜 세계문화사에 특기할 자취를 남겼다. 최대 규모이면서 고도로 발달한 불경의 인쇄와 판화를 남기기도 했다.

이런 사례들은 정교한 아름다움으로 근래 들어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한 고려불화와 더불어 우리의 문화적 전통이 정밀하고 용의주도한 면에도 남다른 특장이 있음을 알려준다. 북한이 발전시켰던 다색목판화 또한 이런 맥이 흐르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러나 이런 느낌이 80년대 이후에는 많이 가셔져서 안타까움을 더해주고 있다. 북한이 도달했던 높은 수준이 더 사라지기 전에 작품들이 소개되고, ‘유학생’을 교류해서라도 전수 받을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바람이다.

/최석태ㆍ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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