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비밀해제된 구 소련의 문서들은 소련이 과거에 학자들이 믿고 있던 것보다 협상에 훨씬 더 많은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주고 있다.

1951년 공산주의자들의 춘계공세가 실패하고 엄청난 피해를 보게 되자 중공과 북한은 스탈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 요구사항은 60개 사단을 무장시킬 수 있는 장비와 소련 군사고문단의 제공, 휴전의 필요성을 유엔군 측에 인식시키는 것 등이었다.

소련은 말리크 유엔주재 대사를 통해 전전(전전)상태로의 복귀를 위한 협상 시기가 됐음을 알렸다. 협상장소를 결정할 때 공산 측은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유엔군 측이 제의한 원산항 밖 덴마크 병원선 대신 공산 측 수중에 있는 개성을 제의, 유엔군 측의 동의를 받아냈다. 장기간의 협상지연 끝에 중공과 북한은 접촉선을 기준으로 하는 휴전선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중공의 소련에 대한 의존도를 유지하는 한편 미국을 약화시키기 위해 전투의 장기화를 선호했다.

휴전회담이 전쟁포로 송환문제로 인해 교착상태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회담 시작 후 10개월 뒤에 협상대표들이 휴전협정에 서명했을 것이다.

휴전회담에 관한 최근의 저서들은 미국과 중공의 국내 정치 및 문화적인 차이와 이념적인 선입관이 불협화음을 조성, 협상지연이 초래됐다고 보고 있다.

중공은 자신의 정치적 우위를 증진시키려는 전략적 목표와 상충되기 때문에 휴전 추구에 성실하게 임했다.

/제임스 매트레이 미 뉴멕시코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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