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첨병 경영학도가 북에 오다니”

지난 2월 3차 이산가족상봉을 위한 생사확인 과정에서 북한은 납북된 이재환씨가 ‘사망’했다고 통보했다. 이영욱 전 의원의 장남인 그는 1987년 미국유학중 오스트리아로 여행갔다가 납북된 것으로 알려져 왔다. 북한은 그가 자진해서 이른바 의거입북한 것으로 발표했는데, 북한의 젊은 대학생들 사이에서도 남한의 고위층 자제가 북한으로 들어온 사실은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평양에서 대학생활을 하고 있었던 유지성씨가 전하는 이재환씨 관련 소식과 그 밖에 월북자들의 생활의 단편을 들어본다./편집자


1987년 북한의 TV에서 다소 충격적인 기자회견을 접했다. 미국에서 경영학을 공부하던 이재환씨의 월북 기자회견이였다. 아직도 큰 키에 미남형으로 생긴 서글서글한 그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놀라웠던 것은 그의 아버지가 남한에서 국회의원을 하는 남쪽에서도 잘 나가던 부유층의 자제였다는 것이다.

TV를 보며 친구들과 보며 도무지 있을수 없는 일이라고 서로 얘기하던 기억도 난다. 남쪽에서 잘 나가던 집안의 자손이고 미국에서 자본주의의 핵심 학문이라는 경영학을 공부하는 그가 뭐가 아쉬어서 북한같은 페쇄국에 자진 월북 했단 말인가?

기자가 월북 동기에 대해서 묻자 이재환씨는 미국내에서 자유롭게 접할 수 있은 북한에 대한 책자와 좌경서적 덕분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얘기를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신빙성이 떨어지는 얘기였다. 기자가 '남조선에서 강제 납북이라고 주장하는데 그에 대한 본인의 의견은 어떤 것인가?'고 물었다.

그러자 이재환씨는 웃으며 "잡혀온 사람이 이렇게 웃을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라고 만 대답하였다. 어쨌든 기자회견을 보면서 느낀 것은 굉장히 아까운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후 그 일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는데 평양지하철 '황금벌역' 옆에 있는 외화상점에서 그를 정말로 우연히 본 일이 있다. 몸이 뚱뚱한 중년의 남자와 동행하고 있었는데 서로 웃으며 물건을 고르고 있었다. 여름이었는데 단정한 T셔츠와 검정바지 차림이었다.
살색을 보니 여자들처럼 해맑은 모습이었다.

그후 1년이 지났을 무렵 친구들속에서는 이재환씨가 남한으로 도주하려다 보위부에 붙잡혔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얘기를 들으며 '글쎄 그럼 그렇지. 그런 사람이 진짜로 여기에 올 일이 없겠지'라고 얘기하던 생각도 난다.

나는 호기심이 동하여 아버지가 보위부에 다니는 외국어대학 친구에게 그 사실을 물었다. 그 친구는 “이재환은 남한 정부가 파견한 간첩이었는데 북조선의 통일전략을 알아내기 위해 침투 되었다고 한다”고 말했다. 사실여부는 물론 알 수 없었다.

북한정부에서도 그의 지식을 높이 사 중요한 사회단체의 중요한 직책을 맡겼는데 그가 다시 남한으로 가기 위해 탈출하려다 보위부에 붙잡혔다'는 것이었다. 이재환씨는 평양역에서 '외화와바꾼돈표'로 국경으로 가는 차표를 일반인에게 구입하고 기차에 올랐는데 증명서 확인을 하던 승무안전원이 그의 증명서를 확인하고는 '특별열차칸 대상'인 그가 일반칸에 탄 것을 수상하게 여겨 단속했고 이재환씨는 탈출하려고 창문을 깨고 뛰어내리다 부상을 입고 붙잡혔다는 것이었다. 그 후 그는 정치범수용소에 감금되었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그러다 남한에 와 뉴스시간에 이재환씨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하긴 북한에서 고통과 굶주림에 어지간히 익숙한 사람들도 끊임없이 죽어나가는 죽음의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서 유족한 생활만 하고 고생을 못해 본 이재환씨가 아직까지 살아있을 것을 바란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란 생각을 한다면 남한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뉴스를 들으며 그의 환한 웃음이 자꾸만 머리를 스쳤다. 북한에는 이재환씨 말고도 월북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들도 자신의 선택에 의한 대가를 받으며 고통속에 살고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평양상업대학(지금의 장철구대학)을 다니던 한 월북자는 정치경제학 시간에 '북한은 공업국가가 아니다. 적어도 공업국가라면 식료품이 부족하면 공업품을 해외에 팔아 국민들에게 공급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 북한은 농업국이다'라고 발언한 탓에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 갔다고 한다.

김책공업종합대학에도 배를 타고 북한에 들어온 청년 두 명이 들어와 공부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했다는 말이 참 웃기는 것이었다. 그들은 학교에 다니다 신발을 여러 켤레 잃어버렸다며 남한에서 자기가 아무리 못살아도 신발을 훔치는 도적은 못 보았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다 한다.

언젠가 미국에서 살다가 온 여성이 월북한 적이 있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녀는 원산에 살고 있는데 커피를 사먹을 돈도 없어 북송교포(귀국자)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커피 한잔 마시자'며 구걸하며 살고 있다 한다. 함경북도의 경성(주을)에도 월북자가 살고 있는데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며 고통속에 살고 있다는 소문도 들을 수 있었다.

월북자 중 몇 명은 북한의 통일전선 전략을 위한 대남 사업 분야에 근무 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아파트도 그들만의 아파트에서 살아야 하며 철저히 통제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납북이든, 월북이든 나로서는 판단할 수 없으나 그들이 비참하게 생활하며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유지성ㆍ평양 음악무용대학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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