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7일 판문점에서 남북정상회담 준비를 위한 2차접촉이 있었다. 경호, 의전, 통신 등 절차 문제에 대해서는 대체로 의견이 접근되어 5월 3일 3차 접촉을 갖고 합의서를 채택할 예정이라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실권자인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회담이냐, 의전상 대표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무위 위원장과의 회담이냐의 문제를 놓고 설(설)들이 분분했었지만 그 문제도 해결된 것 같다.

김정일 위원장과의 단독회담을 최소한 두 차례는 갖게 되는 쪽으로 가닥이 잡혀가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의제 문제다.

합의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는 회담내용을 전혀 공개하지 않기로 한 남·북간의 약속 때문에 북측이 어떤 의제를 제시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대체로 ‘근본문제’라는 것을 의제로 내놓았을 가능성이 크다. 북측이 남북대화의 실행조건이라고 하기도 하고 통일의 근본문제라고 하기도 하는 것은 다름아닌 주한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철폐, 통일운동단체들의 자유활동 보장, 외세와의 공조 포기 등이다. 우리는 김대중 대통령의 베를린 선언을 중심으로 의제를 제의했을 것이다.

북한의 농업구조 개혁과 사회간접자본 확충지원, 한반도 냉전종식과 남·북간 평화 정착, 이산가족 상봉, 당국간 대화 지속 등의 문제를 의제로 내놓았을 것이다.

북측이 남북정상회담을 받아들인 가장 큰 이유는 우리측의 대북지원 의사 때문이라는 것이 국내외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물론 통일문제와 관련하여 김일성 주석의 유훈(유훈)을 이행하고 그리하여 통일지도자로서 김정일 위원장의 위상을 제고하려는 의도도 작용했을 것이다. 정상회담 수락 직후부터 북한 내부적으로 붐을 조성하고 있는 것이 그러한 사정을 방증하고 있다.

지금 북한이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은 명분이 아니라 실리다. 식량난, 에너지난, 외화난을 극복하기 위해 실리를 추구해야 할 때다. 명분론에 사로 잡혀 ‘근본문제’에 매달리다 보면 게도 구럭도 놓치고 마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 그 동안의 교섭을 통해서 남·북관계가 안정적으로 개선되어야만 미국과 일본, EU 등과의 경제협력도 무난하게 진전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북측도 이제는 알고 있지 않는가? 따라서 이번 남북정상회담에서는 ‘근본문제’는 일단 뒤로 미루고 남·북이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 남·북에 서로 도움이 되는 문제, 그리고 쉬운 일부터 협의해서 매듭을 지어 가는 실사구시(실사구시)적 자세가 필요하다.

주한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철폐 등 이런 문제들은 그 성격상 남·북회담 전에 선행해서 해결되기보다는 남·북간 화해와 협력의 결과로 신뢰가 축적된 상황에서 또는 통일의 과정에서 비로소 심도있게 논의되어야 할 일들이다. 그리고 지금의 남·북관계는 화해하고 협력하고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 단계에 있을 뿐, 통일문제를 논의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그런 만큼 이번 평양 남·북정상회담에서는 남·북이 서로 돕고 신뢰를 쌓아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되 하기 쉬운 일부터 문제를 풀어나가는 방식으로 회담을 운영해야만 할 것이다.

남·북간에 신뢰가 쌓이고 공존공영하는 과정에서 차차 논의될 기회가 있을 수 있는 문제, 상황변화에 따라서는 문제의 중요도나 우선순위 자체가 바뀔 수도 있는 문제들은 일단 뒤로 미루자. 세계가 지켜보고 있고 7000만 민족이 기대를 걸고 있는 역사적 만남에서 결론이 쉽게 나지 않을 얘기는 꺼내지 말아야 한다.

이번 회담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이산가족 문제에 숨통이 트여야만 한다. 인도적 차원에서 시급한 문제이기도 하지만, 이산가족 문제가 이제는 민족적 수치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행사성으로 한두 번의 상봉만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북쪽이 열린 자세로 나오기를 기대한다.

하나 덧붙인다면, 형식과 절차면에서 과거 이미 확립된 선례는 그대로 따르는 것이 좋겠다. 판문점이 열린 만큼 예전에 그랬듯이 왕래절차나 경로를 정하면 좋고, 남·북기본합의서에서 썼던 국호 등도 그대로 쓰는 것이 이번 만남의 정치적, 법적 위상을 확고히 하는 것이다.

/정세현 전 통일부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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