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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처형 목격담 '사람이 개처럼 죽는구나..'
강철환  |  nkch@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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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1.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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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남아있던 아내를 데려오려다 북한에서 공개 처형당한 탈북자 유태준씨(본보 3월17일 31면 보도)의 비극적 사연은 충격적이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공개처형이 일상처럼 돼 있고, 북한 주민이면 공개 처형 장면을 몇번씩은 목격한다.
◇공개처형이 있음을 알리는 벽보. 함흥시에는 사포구역, 회상구역 등의 천변에 처형장이 있다.

공개처형되는 사람들은 그전에 심한 고문으로 이미 사람의 몰골이 아니며, 처형 때는 돌로 입에 재갈을 물린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체제 비난 등의 말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형수의 가족들이 처형장에 불려 나와 ‘죄상’을 고발하기도 한다. 사회에서 공개처형되는 사람들은 대개 경제범이나 흉악범들이고, 정치범들은 주로 수용소에서 처형된다. 기자도 요덕정치범수용소에 10년간 있으면서 공개처형을 수십 차례 목격했다.

북한 당국은 주민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고, 특정 사회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하기 위해 공개처형을 하나의 통치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탈북자들이 직접 목격한 공개처형의 실상들을 들어본다.

▶김인호(33)

1992년 11월 15일 오전 11시 함흥시 사포구역 영대다리에서 주순남(당시 나이 30)씨가 공개처형 당했다. 그의 공개처형을 알리는 공고문(사진)이 시내에 나붙었고, 이것이 나중에 남한에까지 알려졌다. 주순남은 제대군인으로 당원이었다. 그는 어릴 때 부모의 이혼으로 외가에서 자랐다. 제대 후 담배장사를 했던 그는 외할아버지에게 술값을 보태달라고 언성을 높이다가 욕을 듣고는 홧김에 할아버지를 밀었는데 그 자리에서 숨지고 말았다.

공개처형날 날씨가 매우 추웠는데도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죽는 사람에 대해 별로 동정이 가지 않았다. 죽을 짓을 했구나 하는 생각만 들었다. 그러나 “사람이 개처럼 죽는구나”하는 생각은 들었다.

▶정남(28)

러시아에 유학간 형님이 한국으로 망명하면서 우리 가족은 평양에서 함경북도 온성으로 추방됐다. 1990년대는 식량난이 본격화되던 시기였고 식량난이 최악으로 치닫던 1996년부터는 한 달에 수차례씩 온성읍 남산에 있는 공개처형장에서 처형이 이루어졌다.

96년부터 2년 사이 내가 직접 본 공개 처형자들은, 두부콩을 훔치다가 살인한 22살난 청년, 협동농장 소를 몰래 잡아 시장에 내다 팔다 붙잡힌 47세의 남자, 6개월 동안 수차례에 걸쳐 옥수수 60kg를 훔친 제대군인, 남의 물건을 빼앗으려고 달리는 기차 지붕 위에서 사람을 밀어 떨어뜨린 32세의 탄광노동자, 공장물건을 몰래 빼돌린 31세의 경리 여직원 등등이었다.

▶안명철(32)

북한에 있을 때 인민경비대 소속 정치범수용소 경비원으로 있었다. 여기는 공개처형과 비밀처형이 함께 진행되는 곳이다. 88년 13호 경성관리소(정치범수용소, 현재는 폐쇄됨)에서 도주하다 붙잡힌 20대 후반의 청년을 5000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처형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나는 그때 죄수들을 통제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죽어야 할 사람이 죽는 것으로 생각했다. 정치범들에 대한 비밀처형은 국가안전보위원들과 술자리를 함께 하면서 수없이 들었고 비밀처형의 현장에서 시체들을 목격한 적도 있다. 정치범수용소 안의 공개처형은 일상생활화 돼있다. 일반 사회와는 달리 한 사람도 빠짐없이 공개처형을 보아야 한다.

▶여금주(27)

어릴때 함흥의 사포구역 영대다리 사형장으로 어른들이 몰려가길래 재미삼아 두 번정도 따라가 본 기억이 있다. 그때는 멀리서 봤기 때문에 큰 충격을 받지 못했다. 확실히 기억하는 것은 1993년 함남 북청군 북청읍에서 농장 강냉이를 훔치다가 들켜 경비원을 살해한 30살의 청년을 수천 명의 군중들을 모아놓고 공개 처형했던 장면이다. 공개처형을 처음보는 여학생들을 일부러 앞자리에 끌어내 구경하게 했다. 나도 앞에서 보았다. 머리, 가슴, 다리 부분에 9발의 총알이 박히면서 말뚝에 매달렸던 시체가 앞으로 꼬꾸라지자 죽은 개를 처리하듯 헌 가마니로 시체를 둘둘 말아 트럭에 싣고 어디론가 갔다. 너무나 처참해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교육받았던 사회주의 ‘우월성’이 이런 것인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은철(32)

평북 신의주에서 고등중학교 물리교사를 했다. 공개처형을 직접 목격한 것은 다섯번 정도 된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96년 신의주시 비행장 근처에 있는 공개처형장에서 벌어진 제대군인 출신 남녀 5명에 대한 공개총살이었다. 여자 2명은 20대 후반의 미모였는데 남자들과 함께 전깃줄을 잘라 중국에 팔아먹다 체포됐다. 젊은 여자가 말뚝에 묶여 총에 맞아 죽는 모습을 보니 너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전깃줄을 자른 것은 큰 죄이긴 하나 저렇게 죽여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꺼번에 많은 사람을 죽이다 보니 수천 명의 군중들이 모여 들어 뒤에 선 사람들은 목을 빼고 처형장면을 보려고 했다.

▶김명학(33)

양강도 혜산시에서만 공개처형을 10번 이상 목격했다. 96년부터 공개처형 횟수가 급격히 늘어나 나중에는 별로 가보고 싶지 않았다. 97년에만 4차례나 공개처형을 구경했다. 밀수꾼들이 워낙 많아 김정일의 특별지시가 가장 자주 내려오는 곳이다. 기억에 남는 공개처형은 인민보안원(경찰)과 결탁한 아편밀수범을 처형했던 장면이다. 혜산시 혜신동 인민학교 뒤 강둑에서 집행됐다. 별로 가고 싶지 않았는데 보안원이 총살당한다고 해서 신기하게 생각돼 구경하게 됐다. 2명을 한꺼번에 자동 보총(소총)으로 쏴 죽였다. 죽은 보안원은 보천군 소속이었다.

/강철환기자 nkch@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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