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에 창광거리, 문수거리, 안상택거리에 이어 광복거리, 통일거리가 건설되고 이곳에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면서 신도시 문화가 생겨나고 있다. 특히 동평양의 문수거리와 만경대구역의 광복거리, 대동강 남쪽의 통일거리는 평양의 도심에서 다소 떨어져 있어 남한의 분당이나 일산과 비교될 만하다.

그러나 아파트에 대한 개념은 남북한간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우선 북한에서는 일반 주택도 마찬가지만 아파트는 평수가 아니라 방이 몇 개냐로 평가된다. 가령 “너의 집에 방이 몇개냐”고 물어보지 평수가 몇 평이냐고 묻지 않는다. 아파트의 크기는 그 집의 생활수준과는 무관하다.

북한의 대부분의 아파트는 복도식이 아닌 계단식으로 돼 있으며 내부도 거실이 없는 복도식이 많다. 신도시 아파트도 마찬가지다. 화장실은 대부분 수세식으로 돼 있다. 18평 이하는 거의 없으며 방이 2개인 경우는 24평 정도, 방이3~4개면 30평 이상되는 집들이다. 따라서 아파트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일단 먹고 살만한 계층임이 틀림없다.


◇평양시 만경대구역의 광복거리 전경, 1989년 12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지시로 김 주석의 80회 생일(1992.4.15)을 맞아 3만 가구의 아파트가 새롭게 건설됐다.
새로 건설된 아파트 가운데 가장 좋은 곳은 평양 중심부 고려호텔 주변의 창광아파트다. 이곳에는 보통 중앙당 고위간부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방이 3개 이상 되고 주방용품도 대부분 수입품을 쓰고 있다.

재일교포나 외화벌이 일꾼들을 비롯한 신흥부자들이 몰려 사는 곳은 안상택거리와 문수거리 일대다. 평양 외곽의 광복거리는 권력층과 연관된 계층이나 중류 간부층이 많고 대동강 남쪽 통일거리는 노동자계층을 비롯한 중산층이 몰려 있다.

안상택거리나 동평양의 문수거리에는 자가용 승용차를 많이 볼 수 있고 베란다에 널린 옷가지들도 외제가 많이 눈에 띄어 잘 산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인민반(30~50가구)을 단위로 매일 여러 가지 활동을 벌이기 때문에 주민들은 어느 층에 누가 사는지 다 안다. 아침청소나 눈치우기, 위생활동(환경정화활동) 등에는 가구별로 빠짐없이 참가하게 돼 있다.

아파트 출입구에는 반드시 경비원들이 있는데 이들의 위세는 대단하다. 특히 신도시의 경우는 낯선 사람에겐 무조건 신분증을 요구하며 이 때문에 마찰도 많이 일어난다. 경비원은 직장에 나가지 않는 주민들을 동원해 교대로 순번을 정해 놓고 인민반장의 협조아래 아파트 출입자들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다. 인민반은 동사무소로, 동사무소는 인민보안성(경찰)으로 연결돼 사람들의 동향을 철저히 감시한다.

사정이 이러니 경비원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이 많다. 외화벌이나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은 경비원이 눈엣가시처럼 미울 수밖에 없다. 씀씀이나 집안살림이 가계수입에 어울리지 않게 지나치면 우선 신고대상이 된다. 부수입으로 이런 저런 물품이 생겨도 집으로 가져가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경비원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아파트 뒷편에서는 베란다를 이용해 물건을 밧줄에 매달아 끌어올리는 광경이 이따금씩 목격되기도 한다. 경비원들이 특히 주목하는 것은 젊은 학생들이 무리지어 다니는 것이다. 몰래 외국 비디오를 보거나 무슨 음모를 꾸밀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집들은 정기적으로 보고되며 불시에 인민보안성의 검문을 받기도 한다.

평양의 대다수 아파트의 난방은 중앙공급식이다. 문제는 취사용 연료인데 평양의 중심부인 창광거리를 비롯한 중구역일대 아파트에는 석유 대신 가스로 대체됐으나 아직도 많은 아파트에서 석유를 사용한다. 아파트 동마다 석유판매소가 있고 석유통이 집집마다 마련돼 있다. 부식물이나 생활용품은 구역마다 직매점이나 남새(채소)상점에서 구입할 수 있고 신발, 비누, 식용유, 옷가지 등 생필품은 한달에 한번씩 나오는 쿠폰을 가지고 백화점에서 살 수 있다.

비교적 오래된 아파트들에서는 아파트 단지 한 가운데 커다란 굴을 파고 거기다 집집마다 김치우리를 만들어 김칫독을 묻고 밖에서 걸어 잠근다. 80년대까지만 해도 누구네 집의 김치가 맛있는지 슬쩍 먹어보기도 하는 등 그런대로 여유가 있었으나 최근엔 김치도둑 때문에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신도시의 경우는 주변이 콘크리트로 뒤덮인 것도 있지만 미관상 김치굴을 허용하지 않아 땅속에 묻힌 맛있는 김치 맛을 볼 수 없다. 주로 베란다가 김치보관 장소로 이용되고 있으며 식량난이 악화된 90년대에는 건설장에 동원된 군인들과 돌격대원들이 김치를 마구 훔쳐가는 통에 저층의 아파트들은 불안하다.

최근 평양의 신도시에서 살다온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연료난으로 인해 새로운 풍속도가 만들어지고 있다. 전력난으로 승강기가 작동하지 않아 10층 이상의 고층을 걸어서 올라가야 하고, 석유공급이 전면 중단돼 베란다에서 나무로 불을 지펴 밥을 짓는 통에 벽이 온통 시커멓게 그을려 있다.

집안에서는 일체 짐승을 키우지 못하게 돼 있지만 베란다에서 돼지나 닭을 키우는 집도 눈에 띈다고 한다. 전기사정 때문에 아파트에 물이 나오지 않아 대동강이 가까운 문수거리 등에서는 강에 나가 물을 길어오기도 한다.
/강철환기자 nkch@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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