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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못할 나의 평양음악대학 시절
유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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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1.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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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음악 몰래 배우며 연애에도 빠져"
유지성 (평양음악무용대학 졸업)


◇대학구내의 학생들. 대학생들은 수업시간외에는 학교구내나 대동강, 모란봉 등에 가서 자유시간을 갖기도 한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나름대로의 잊지 못할 애틋한 추억이 있게 마련이다. 내 인생의 가장 애틋한 추억으로 남는 것은 그래도 북한에서의 대학 생활이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녹음이 우거진 아담한 대학 캠퍼스의 전경과 다정한 친구들 하나 하나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울고 웃으며 현실을 논하고 서로의 꿈을 나누던 그 시절 친구들의 모습이 지금도 마냥 그립기만 하다.

내가 평양음악무용대학에 입학한 것은 1970년대 후반이었다. 그때만 해도 북한 경제체제의 모순이 표면 위에 떠오른 시기도 아니었고 평양시의 대부분 사람들이 굶주림이라는 말을 모르고 지내던 때였다.

또 나의 경우는 음악대학에 입학하는 다수의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북한 내에서는 나름대로 잘 나가는 집안의 외아들이었다. 북한에서도 음대에 들어가려면 실력도 중요하지만 역시 '빽'이 필수적이다. 최근 북한의 경제사정이 어려워지면서 대학입학도 뇌물 순이라는 말도 들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북한 보통의 가정에는 가지기 힘든 일제 피아노나 일제 오디오 등 음악공부에 필요한 모든 필수품들을 아버지는 어렵지 않게 나에게 구입해 주셨다. 그러고 보면 우리 집 생활수준도 북한에서는 최고의 수준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북한의 평양음악무용대학은 여기 남한과 달리 예능계 중고등학교를 별도로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대학 안에 예비교육반 3년, 전문부 3년, 대학부 4년의 편제를 두고 운영되고 있다.

내가 음악대학 예비교육반에 입학한 것은 13살이 되던 해였다.
당시만 해도 북한의 모든 고등중학교들이 남녀 분학을 실시했던데 반해 음대만은 남녀 공학을 실시하였다. 꿈을 안고 시작한 나의 음대 생활의 초반은 너무도 즐겁기만 하였다. 짝꿍도 마음에 들었고 음악공부도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음악대학에 일단 입학하면 모든 학생들이 평양음악무용대학이라고 새겨진 대학 배지를 가슴에 달고 다니는데 그 배지를 달고 거리로 나가면 많은 사람들이 부러운 시선으로 쳐다보곤 했다. 그것은 음악대학에서는 보통 중고등학교에서는 봄이나 가을이면 연례 행사처럼 진행되는 농촌지원이나 집단체조(매스게임)를 비롯한 일체의 동원에 참가하지 않고 식량 공급에서부터 교복공급에 이르기까지 특혜를 받기 때문이었다.

오전은 일반 학교들과 같이 보통의 수업을 받았고 오후에는 전적으로 전공강의실에서 악기만 연습하였다. 베토벤, 슈베르트, 차이코프스키 등 세계 유명한 클래식은 기본으로 배웠고 그 외에 금지된 자본주의 곡들도 몰래 배웠다. 음악의 세계에는 사상과 이념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아침, 저녁으로 어린 학생들을 위한 통학 버스도 다녔기에 생활하기에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그때만 해도 간혹 통학 버스가 다니지 않는 곳의 학생들을 위해서는 별도의 교통비까지 국가에서 나오기도 하였다.

부조리한 세상을 몰랐던 철부지였던 그 시절이 어찌 보면 나의 인생에서는 가장 행복한 시기였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세계에 대한 동경도 남달리 컸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그때 읽은 학생잡지의 기사가 생각난다. 그 기사의 제목은 '10년후의 우리 생활의 변화'였는데 그 내용을 보면 10년 후엔 사람이 일어나면 자동 센서가 스스로 사람의 행동을 감지하여 방안을 밝혀 주고 집에 앉아서 TV화면으로 그 날 신문을 읽으며 학생들의 학습을 도와주는 TV도우미가 나온다는 등 당시로서는 꿈같은 일들이 그려져 있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북한 사회가 참 좋은 사회이며 우리의 미래생활은 잡지기사의 내용처럼 희망찬 것이라고 믿었다. 10년이 지나서 그때 봤던 잡지생각이 떠올랐는데 세상은 거꾸로 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북한사회는 발전은커녕 점점 더 쇠퇴해 갔기 때문이다. 또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굶주리는 남녘의 어린이들이라는 이야기를 그대로 믿고만 자랐지만 얼마나 허황한 거짓이었는가를 알게 되는 과정은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대학 예비교육부 3년 과정을 마치고 전문부 3년 과정을 시작하면서부터는 북한의 모든 대학들과 마찬가지로 군사편제로 조직이 짜여진다. 말단편제는 분조이며 그 위로 올라가면서 소대, 중대, 대대가 구성되고 조직생활도 군대식으로 엄청나게 강화된다.

점차 즐겁기만 하던 대학생활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대대모임, 중대모임, 소대모임, 분조모임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계속 학교에만 붙잡혀 사열식 등 집단훈련에 열중하다 보니 학생이 아니라 군인이 된 기분도 들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사상투쟁도 강화되고 생활총화 등도 더 강화됐다.

이유는 개인 시간을 많이 가지면 안이해지고 수정주의 날라리 풍에 전염(?)된다는 것이었다. 분기에 한번씩 사로청(현 청년동맹) 총회를 하는데 거기에는 연애를 하다가 적발된 학생들을 무대에 세워 놓고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썩어빠진 수정주의 사고에 젖어 연애나 하고 다닌다고 말도 안 되는 비판을 하곤 하였다.

그런 통제 속에서도 젊음이야 어디 가랴.....
내가 속한 학급만 해도 전문부를 졸업할 즈음에는 연애 안 하는 학생이 거의 없을 만큼 모두 숨겨 둔 여자친구를 가지고 있었다. 북한 같은 열악한 교통환경에서 조금만 늦어도 집까지 걸어가기가 일상사지만 여자친구를 집까지 바래다주고 자기 집까지 걸어서 갔던 사랑의 추억도 가지고 있다. 커피숍과 같은 남녀가 별도로 만날 장소가 부족한 북한에서 유일한 데이트장소는 대동강가이다. 많은 대학생들이 저녁이면 책을 들고 강변으로 몰리지만 실제로는 데이트하러 오는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주위에는 낭만적인 친구들도 많았다. 가을이면 시내에서는 느끼기 힘든 가을만의 정취를 느끼려 서로 여자친구들과 함께 대성산에 있는 식물원을 자주 찾았고 겨울이면 누구도 밟지 않은 흰 눈을 함께 밟자며 모란봉에 자주 오르곤 하였다.

그래도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노농적위대 훈련을 나갔을 때의 추억이다. 보통 때는 대학에만 가면 엄격한 조직생활 때문에 짜증스러운 일들이 너무 많은 북한의 대학생활이지만 노농적위대 훈련기간에는 오히려 상대적으로 자유스러웠다고 기억된다.

군사훈련 기간이라 너무도 힘들었지만 그것을 마치고 오락회나 요리 경연 같은 시간들에는 끼가 넘치는 자체 창작한 곡들도 부르고 요리 솜씨도 자랑하면서 서로의 넘치는 개성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그 다음으로 기억에 남는 것은 한해를 보내며 동창들끼리 모이는 망년회(송년회) 자리다.

여기처럼 네온사인이 번쩍이고 푸짐한 음식은 차리지 못하고 친구의 집에서 소박한 음식들을 차린 모임이지만 언제나 친구들과의 송년회는 마냥 기다려지는 시간이었다. 누구의 아이디어인지는 지금으로서는 잘 기억되지 않으나 벽에 큰 종이를 붙여놓고 모든 동창들이 20자 내외로 낙서를 하기로 하였는데 그 다음해에 그 낙서를 다시 보며 흘러간 한해를 떠 올려 보군 하였다.

누구와 누가 친해지라는 등 짧은 사랑시, 지긋한 농담으로 가득 채워진 낙서장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유치한 글들이지만 그래도 그런 기억들은 나의 가슴속에 따스한 추억으로 남아 아직도 나의 마음을 보듬어주고 있다.

북한의 대학에서는 매년 한번씩 사로청 위원장을 비롯한 청년 조직의 간부들을 선거의 방법으로 뽑는다. 말이 선거이지 실상은 대학 당조직에서 추천한 사람을 선거라고 이름 붙인 광대놀음을 통해 발표하는 것이었다.

당시 음악대학의 사로청 위원장의 별명은 '돈키호테'였다. 너무도 상식에 어긋나는 말을 함부로 하고 어린 학생들이 외국노래를 교내에서 부른다고 구타를 하는 등 학생들의 미움을 등에 달고 사는 자였다. 정상적인 민주선거에서는 그런 사람이 표를 받을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지만 대학 당위원회에서는 그를 사로청 위원장의 직책에 올려놓았다.

이유는 한 가지 출신 성분이 좋고 노동당에 충실하다는 것이었다. 선거가 있는 날에 친구들이 "선거하러 가는 날이지?" 하고 물으면 친구들은 "손만 들어주러 가는 거지 뭐"라면서 위선적인 북한의 선거제도를 비웃었다.

북한에서는 소년단 시절부터 죽기 전까지 일생동안 이러 저러한 정치조직에 매여서 매주 생활총화를 하는 것이지만 음악대학의 그것은 더욱 엄격히 진행되었다. 매주 진행되는 생활총화에서 잘못도 없으면서도 총화를 강요당하는 형편이니 별의별 아이러니한 일들도 많이 생겼다.

어떤 친구는 생활총화 책을 날짜는 쓰지 않고 여러 가지 사례의 자기잘못을 적어놓고 매번 돌려가면서 생활총화를 하다가 적발돼 혼나기도 하였다.
어느 날인가 한 친구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빨리 생활총화에 참가하라는 사로청 위원장의 말에 어지간히 짜증이 났던지 갑자기 '와당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그리고는 한다는 말이 "나는 평소에 조직을 존엄 있게 대하지 않던 나머지 일어날 때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일어섰습니다. 앞으로는 꼭 고치겠습니다" 하고 '쾅' 하고 앉으며 말하는 통에 폭소를 자아내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대학 본 학부 과정에 진학하게 되었다. 그 나이 때의 뭇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때부터 사회에 대해 조금씩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북한의 경제는 계속해서 제자리 걸음, 혹은 마이너스 성장을 하던 때였다. 평양시의 경제형편도 나날이 나빠져 갔다. 그러나 친구들과의 대화 속에서 도출되는 답도 김일성은 잘 하고 있는데 아래 당 간부들의 거짓보고와 무책임함 때문에 경제가 나빠지고 있다는 식의 주입식 교육을 받은 사람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들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못사는 나라라고 교육받아온 남한이 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올림픽을 개최한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가난하다는 남한에서 어떻게 올림픽 개최가 가능할까?" 다는 알 수 없었지만 무엇인가 북한에서 교육하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점차 깨달아 갔다.

언젠가 주위의 친구로부터 서울에 이어 평양을 방문한 전 서독 작가 루이제 린저가 북한보다 남한이 훨씬 경제적으로 발전하였다는 이야기를 하였다는 얘기를 듣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

그때부터 나만이 아니라 주위의 친구들도 남한에 대해서 점차 관심을 가지고 남한 방송을 몰래 청취하는 친구들이 늘어났다. 어디 가서는 그런 얘기를 절대 하지 않았으나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온 주위의 친구들에게는 무슨 얘기든 거리낌이 없었다. 친구들 사이에서만은 세상 돌아가는 정보를 공유하곤 하였다.

88서울 올림픽이 다가오면서 대학가에는 많은 남한 가요들이 불려졌고 기타 붐이 일면서 친구들끼리 모여 남한가요를 부르는 것이 하나의 문화적 현상으로까지 자리잡았다. 남한 가요를 모르면 완전히 '왕따'가 되기 십상이었다. 제일 먼저 접한 남한가요는 '어제 내린 비'였다 북한과 달리 정치성을 배제된 인간의 진솔한 삶에 바탕을 둔 사랑과 우정을 노래한 남한가요들이 젊은 북한 대학생들에게 많이 불려진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 대학시절이 나의 인생에서 가장 많은 문예작품을 읽은 시절이기도 하였다. 북한에서는 많은 소설, 시, 시나리오 등이 작가들에게만 허용된 '100권 한정판'으로 분류되어 보통사람들은 읽기가 힘들었으나 친구들 사이에서는 그 모든 책자들이 소리 없이 돌려 읽혀지고 있었다.

아직도 잊혀지지 않고 뇌리에 남는 음악대학 어느 한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나는 여러 사회에서 살아보았다. 이승만 정권에서도 살아보았고 소련에서 유학생활도 해보았고 과오를 범하고 지방 탄광에서 노동도 해보았다. 지금의 우리 사회는 뭔가 근본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 역사적으로 봐도 지성이 등돌린 세상이 오래 가는 시대는 결코 없었다." 이런 말씀을 하신 교수님께서 그 험악한 북한 사회에서 얼마나 더 견뎌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희망에 넘쳐 시작한 대학생활이었지만 대학생활은 젊음의 꿈을 키워주는 장소는 결코 되어주지 못했다. 그나마 대학생활이 추억의 한 켠에 언제나 남아 자주 떠올려지는 것은 그 속에 함께 웃고 울고 뒹굴며 정의를 논하던 어릴 적 친구들이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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