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이후 6·25전쟁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서울은 남북한과 해외를 막론하고 전체 한민족의 마음의 고향, 한반도를 대표하는 명실상부한 중심도시이자 수도였다. 1948년 9월 평양에 북한의 중앙정부가 수립되지만 수도는 어디까지나 서울이었다. 실제로 그들 헌법에도 "수부(首府)는 서울시"(제103조)라고 명시됐다.

하지만 "수도=서울"의 개념은 6·25전쟁을 고비로 평양의 위상이 부상하면서 변하기 시작한다. 전쟁을 치르면서 "우리 조국의 민주수도 평양"으로 변하며 1960년대 중반 "혁명의 수도 평양"을 거쳐 1972년 12월 개정된 사회주의헌법에서 "수도는 평양"(제149조)으로 규정되기에 이른다. 이는 1998년 9월 개정된 현행 헌법에도 그대로 반영됐다.

김일성 주석은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월 도시설계일꾼들을 대상으로 행한 담화에서 전쟁이 끝난 다음 평양시부터 복구건설해야 한다면서 "평양은 우리 조국의 민주수도"라고 주장했다. 그는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체결을 기해 발령한 최고사령관 명령(제470호)에서도 예의 "우리 조국의 민주수도 평양"을 고창했다.

김 주석은 1966년 5월 언어학자들과 가진 담화에서 평양을 중심지로 하고 평양말을 기준으로 하는 민족어 발전을 강조하면서 그 근거로서 평양이 "혁명의 수도"임을 강조했다. 그는 평양말을 기본으로 하여 발전시킨 말을 "표준어"로 부르는 것은 부당하다며 다른 이름으로 부를 것을 주장하는데 "문화어"는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1972년 10월 인민군 부대 정치위원들과 가진 담화에서 "혁명의 수도를 보위하는 것은 부대의 첫째가는 임무"라고 말해 "혁명의 수도"를 언급한 바 있다.

평양이 일개 지역 도시에서 "우리 조국의 민주수도"를 거쳐 "혁명의 수도"로 격상하는 동안 서울은 그에 반비례해 평가절하됐다.

지난해 평양에서 발간된 [조선대백과사전](제13권)의 "서울시"에 대한 설명은 북한 사회에 투영된 서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총 682쪽 가운데 3쪽반 가량을 할애한 설명은 전반적으로 냉혹하고 자못 신랄하다.

우선 서울은 "서부조선(한반도 서쪽)에 있는 시"로 격하되어 있다. 도급의 특별시나 광역시도 아니고, 군·구와 같은 수준의 고만고만한 도시 가운데 하나로 규정된 것이다. 전체 한반도를 대표하는 상징성이나, 정도(定都) 600년을 자랑하는 역사성, 인구 1000만을 상회하는 국제도시의 이미지는 찾아보기 어렵다.

구체적인 설명에 들어가면 더욱 한심해진다. "미제침략자들과 남조선 괴뢰도당의 파쑈통치기구가 집중되어 있는 소굴," "미제의 식민지통치의 아성," "매국배족을 일삼는 국내반동들의 집결처," "수백만 인민들의 인간생지옥" 등으로 묘사되어 있다.

서울시의 강·하천에 대한 설명도 부정적이긴 마찬가지. "특히 8·15이후 미제와 괴뢰도당의 반인민적 통치밑에서 치산치수사업을 잘 하지 않아 큰물(홍수)에 의한 피해가 몹시 심하다"고 적고 있다. 서울시의 지하철도 서울역∼청량리간의 1호선만 소개되어 있으며, 그나마 "안이 비좁고 공기가 오염되어 있으며 방수처리가 안되어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여러 모로 불편을 주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서울시의 "경제"는 "미제의 식민지예속화정책과 일본을 비롯한 외래독점자본의 침투, 괴뢰도당과 매판자본가들의 가혹한 수탈로 하여 걷잡을 수 없는 파국상태에 놓여 있다"고 혹평하고 있다. 상업 역시 "외국자본과 결탁된 일부 매판자본가들이 경영하는 상점을 제외한 서울시안의 상점들은 대부분이 가게방과 노점상들"이라고 형편없이 폄하하고 있다.

사전은 여느 도시에 대한 설명과 달리 "공해"라는 항목을 별도로 설정하고 서울시의 환경실태에 대해 자세히 적고 있다. 이를테면 청계천 안양천을 비롯한 한강의 지류들은 서울시민들의 오물처리장으로 이용됨으로써 여름철이면 악취와 파리, 모기가 성하여 각종 병균의 배양장이 되고 있고, 물의 오염으로 장티브스 콜레라 급성간염 등 전염병이 자주 발생한다고 기술돼 있다. 한 마디로 "서울시는 매일 매시간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빼앗아가는 "숨막히는 도시""로 되어 있다.

북한의 일반 주민들도 대부분 서울이라고 하면 부정적이고 어두운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는 것으로 전해진다. 서울의 사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는데다 [조선대백과사전]의 기술이 보여주는 것처럼 일상적으로 접하는 정보와 지식이 온통 부정 일변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 주석 사후 경제난 등으로 사회적 통제가 이완되면서 조금씩 인식의 변화를 보이고 있다고 탈북자들은 전한다.
/김광인기자kk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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