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세상을 떠난 한경직 목사에게 영락교회는 그의 ‘분신(분신)’과 같은 존재였다. 그가 목회 일선을 떠나 원로목사가 된 것이 이미 1972년 일이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영락교회’하면 곧 ‘한경직’을 떠올린다. 보잘 것 없는 개척교회에서 시작해 20년만에 국내 최대 규모의 교회로 자리잡았던 영락교회의 성장사는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영락교회는 1945년 12월 2일 서울 영락동(현재 저동) 천리교 경선분소 건물에 한경직 목사와 북한에서 내려 온 27명의 개신교 신자들이 모여 ‘베다니 전도교회’란 이름으로 출발했다. 자신이 불과 두 달 전 북한의 공산 정권을 피해 내려온 처지에 있던 한목사는 “앞으로 남하하는 피난민이 격증할 것이니 이들을 위한 교회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의 예언은 적중하여 교회는 창립 1년 만에 신자가 1500명에 이를 만큼 비약적인 성장을 보였고 교회 이름도 ‘영락교회’로 바꾸었다.

6.25로 일시 시련을 겪기도 했지만 전쟁이 끝나자 다시 신자는 꾸준히 늘어갔고 묘지, 유치원, 신학교 등 부설 기관도 잇달아 만들어졌다. 1972년 한경직 목사가 은퇴할 무렵 영락교회는 이미 신자가 15000명에 이르는 한국의 대표적인 교회로 성장해 있었다.

한경직 목사는 27년간 영락교회에 시무하는 동안 많은 대외 직책을 맡았지만 언제나 그의 활동 중심은 교회였다. 그는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주일 대예배 설교는 직접 했으며 건물 하나, 나무 한 그루에도 그의 숨결이 깃들여 있을 정도로 교회에 정성을 쏟았다. 한 목사는 설교를 통해 교인들에게 철저한 복음주의 신앙에 기초한 청교도적인 생활과 올바른 사회봉사, 참여를 강조했다.

한경직 목사는 1972년 말 은퇴 이후에도 원로목사로서 영락교회의 병풍 역할을 했다. 남한산성 수양관에 생활하면서도 주일과 수요 예배에 빠지지 않았고 후임 목사들이 자리를 잡지 못해 교회가 흔들릴 때는 직접 나서서 신자들을 안정시키기도 했다. 한경직 목사는 마지막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장소도 그가 그렇게 아꼈고 혼신의 힘을 기울여 가꾸었던 영락교회를 택함으로써 자신이 온전히 ‘영락의 사람’임을 입증했다.

/이선민기자 smlee@chosun.com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