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미완으로 남은 그들의 꿈과 생애


80년대 대학 시절 한국문학사 수업시간에 만난 일제시대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관련 문건들에서는 어김없이 삭제된 글자나 문장이 등장했다. 임X, 이X영, XXXX 혁명, XX투쟁. 사라진 글자는 하나의 미로였고, 이를 추측한다는 것은 복잡한 퍼즐게임을 푸는 과정과도 같았다.

삭제된 문자 투성이의 구문서들은 이들 존재의 운명에 대한 내밀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들을 학문적인 용도로 언급한다는 것조차 금지되었던 시기였다. 일제시대 계급과 민족 문제로 이념과 열정을 불태우다 월북했던 지식인들의 삶은, 실천적 지성이 요구되었던 80년대의 대학인들에게는 하나의 거울이었다.

그러나 1988년 정작 월북 문인들의 작품이 해금되었을 때, 그 금지된 문서에서는 이념의 치열성이나 강렬한 혁명의 열기는 느낄 수 없었다. 그들의 작품은 너무 순수하거나 소박했고 혹은 아무런 이념적 흔적을 찾을 수 없었던 것도 많았다. 그들 작품이 불온문서로 취급되었다는 것 자체가 전율을 일으켰다. 백석의 시들은 이념이 아니라 유년 시절에 품었던 온갖 신화와 몽상들로 채색되어 있었고, 결혼 실패와 방랑, 실직과 이직 같은 개인적인 어떤 상처에 기대 있었다.

‘월북’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적색 이념의 공포, 비밀경찰, 국경선을 넘나들 때의 그 비장한 마음의 자물쇠 같은 것들, 어느 것도 느낄 수 없는 것이 놀라울 뿐이었다. 월북 시인으로 규정당한 백석의 생애와 그의 시가 보여주는 순수 유년의 세계 사이의 낙차는 역사가 한 개인에게 던지는 폭력을 의미했다.

소풍가듯 “나 이북간다” 하고 월북한 김순남의 운명은, 월북 지식인들에게서 이념의 절대성과 투철성을 확인하고자 했던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의아한 것이었고, 한 개인의 운명에서 참혹한 역사의 사슬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들 청춘들이 품었던 열정과 이념을 향한 순수동기와 월북의 후일담은 그래서 더욱 관심을 끌었다.

그들 월북 이후의 삶은 우리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알 수도 없었다. 북한 ‘조선문학’ 등의 잡지에서 그들의 마지막 흔적을 찾거나 일본인들에게서 귀동냥으로 들은 풍문을 통해 그들 최후를 추정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들 이름이 문학 연구서들에서 언급될 수 있다는 것이 그들 문학 전체나 생애 자체가 복원된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해금은 시작에 불과했다. 월북 지식인들의 생애는 여전히 미완으로 남았다. 이번 시리즈에서도 백석, 임선규, 김순남 등등의 사망연대는 여전히 물음표로 표기되었다. 이 물음표는 아마 우리 지성사 또는 이념사가 미완의 형태로 남겨졌음을 보여주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북한에 대한 관심은 어느 때보다 뜨겁다. 이제 분단된 우리 현대사의 정리, 사상사적 정리, 인간학적 정리가 필요한 시점이 왔다. 갈라지고 훼손된 지성사를 복원함으로써 정신적 이념적 통합을 이룰 바탕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월북 지식인들은 너무 오랫동안 우리들에게 잊혀졌고 망각의 존재로 현대사에 묻혀 있었다. 이쾌대를 보고 독자들이 갖게 된 “우리에게도 이런 화가가 있었던가” 하는 놀라움은 그 망각의 이면이었다.

“함흥이 고향인 한설야가 어떻게 월북 지식인인가”라는 독자 질문은, 월북 이념 전향 등의 문제는 개인의 내적인 이념 성향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현실정치와 남북한 역학관계 등에 의해 지배된다는 사실을 되돌아보게 했다. 월북이란 단순한 공간 이동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당대 지식인들의 월북은 많은 경우, 그들이 이상적으로 품었던 인간화 된 사회 및 체제, 사회주의 조국에 대한 동경을 의미했다. 또한 그들의 월북은 이념의 선택이라는 능동적 성격을 가지기에 앞서 이념인으로서 ‘규정당함’이라는 피동성과 그로 인한 비극성을 동시에 내포했다.

카프-월북-숙청은 월북 지식인사들에게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백남운이나 이기영 등은 자연사로 생애를 마감했고 정치적으로도 성공했지만,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그 최후의 흔적조차 불분명하게 사라져버렸다. 그들의 월북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운명의 표정을 띠고 있어서 존재 자체가 내밀한 울림으로 전해졌다. 감정적으로 움직였고 친구따라 별 사상적 고민없이 북을 선택했던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의 선택은 전적으로 오류였거나 사상의 미성숙에 의한 조급증이었을 수도 있다.

그들 몇몇은 후회했을 것이다. 시 쓰기를 금지당하고 작곡을 금지당하고 학자적 양심을 접은 채 정치에 이용당하고 협동농장이나 수용소로 추방되면서 그들은 월북한 것에 대한 뼈아픈 후회를 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들의 선택을 비판하고 이념인으로서의 오류를 하나 하나 지적할 수도 있다.

그럴 때 우리는 문득 ‘소련기행’을 쓰고 공산주의로부터 전향한 앙드레 지드를 떠올릴 수도 있지 않을까. 지드는 말했다.


“아아, 내가 공산주의에 도달한 것을 감정적인 일로 본 당신들은 얼마나 옳았는가. 그러나 그런 내가 옳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얼마나 잘못된 일이었는가.”

지드는 그것을 인간에 대한 열정, 사랑이라고 말했다. 그들이 몰입해 간 사상의 궤도를 어떻게 잘-잘못의 직선을 그어 단죄할 수 있겠는가. 그들의 이념의 토양이 됐던 민족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이제 우리가 품어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조영복<광운대 국문과 교수ㆍ문학평론가>eternity@daisy.gwu.ac.kr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