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한다는 남북한 발표에 깜짝 놀랐다. 김대중 대통령의 베를린선언에서 나타났듯이 남북한 당국 사이에 비밀접촉이 진행중이라는 한국발(발) 정보는 듣고 있었다. 그러나 4·13총선까지는 그다지 가시적 진전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북한특수(특수)’를 예고하는 김대중 정권의 낙관론도 선거를 겨냥한 선전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다. 4·13선거에 여당이 승리하면 남북관계는 본격화되지만 반대로 승리를 못 거두면 북한은 한국과의 관계개선에 그다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을 것이라는 게 내가 그린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베를린선언도 남북한 비밀접촉이라는 뒷받침이 있어서 발표된 것으로 밝혀졌으며 북한도 김대중 정권과의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하겠다는 대전환의 선택을 했다.

다만 북한이 미·일 양국과의 관계개선을 우선하고 남북관계는 소극적 입장을 견지한다는 이른바 ‘한국우회’ 전략을 포기했을 것이라는 분석은 너무 성급하다. 북한이 남북관계 개선을 우선하는 방향으로 전략을 전환했다고 보기엔 아직 이르다. 남북 교류를 빠른 속도로 풀어가면 남한에 의해 흡수당할 것이라는 경계심을 북한이 완전히 불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북한으로서는 남북 분단체제라는 현재 상태를 유지하면서 남북격차를 어떻게 줄여나가느냐가 단기적으로 설정한 우선과제다. 남한에 의지하지 않으면서 미·일·유럽 제국과의 관계개선을 바탕으로 경제재건을 성사시킴으로써 좀더 대등한 조건으로 남한과의 외교에 임하는 것이 합리적 선택이라고 북한은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 남한의 정상회담 개최요구를 북한이 받아들인 것은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남북관계 개선을 본격적으로 착수하지 않고는 미국·일본과의 관계에서 충분한 교섭력을 확보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진행해온 북·미, 북·일 교섭의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는 점이다. 미·일 양국과의 교섭에서 북한이 가진 교섭수단이 그다지 많지않은 조건 아래서 남북한 관계개선에 따른 ‘남한카드’는 미·일 양국에서 무언가 양보를 이끌어내기 위해 유효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둘째,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이 지향하는 단기적 목표가 흡수통일이 아님을 북한이 점차 ‘신뢰’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북한으로서는 남한에 흡수통일 당하는 것이 최악의 시나리오이며, 반드시 막아야 하는 절체절명의 목표인 것이다. 그동안 남한 정부가 과연 그것을 포기했는지 확신을 갖지 못했지만 이제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이를 포기했다는 믿음을 북한은 갖게 된 듯하다.

어쨌든 북·미, 북·일 교섭과 나란히 남북한 정부 사이에서도 본격적으로 대화가 시작됐다는 것은 한반도, 나아가 동북아 평화를 창조하기 위해 아주 중요하고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환영해야 할 일이다.

일본 입장에서는 북·일 국교정상화 교섭과 관련해 남북간 관계 진전이 갖는 의미가 대단히 크다. 북한은 한편으로 일본에서의 양보를 얻어내기 위해 한국 측의 묵시적인 ‘지원’을 기대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대일 교섭에서 북한의 요구가 한층 더 강경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기미야 마사시 도쿄대학 교수·한국현대정치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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