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독일통일과정이 한창 진행중이던 90년 봄, 동독의 한 기자가 불쑥 던진 한마디가 새록새록 되새겨지는 요즘입니다.

“한국(남북한) 사람들은 정말 놀랍다.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무조건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그렇게 순수한 통일 열정을 가진 민족은 아마 지구상에 없을 것이다.”

당시 독일 사람들은 통일의 주판을 열심히 튕기고 있을 때였습니다. 통일이 각 개인과 집단, 그리고 국가에 가져올 득과 실을 재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동독 지역에는 어떤 경제정책을 취할 것인가, 세금은 얼마를 올려야 할 것인가, 동서독 화폐통합은 몇대 몇의 비율로 할 것인가. 수많은 문제들을 놓고 정당간에, 각종 이익집단간에, 또 서독인과 동독인간에 치열한 논전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동독기자의 눈에는 독일인들의 이같은 태도가 ‘소상인 기질’로 비춰졌고, 실리를 따지지 않고 통일을 외치는 한민족이 부러웠던 것이지요.

분단시절 독일에서는 통일이라는 단어조차 쉽게 꺼낼 수가 없었습니다. 동독은 초창기부터 서독으로부터의 ‘독립’을 국내외 정책의 최우선으로 삼았으니 말할 것도 없고, 서독에서도 통일을 주장하면 극우파로 몰리기 십상이었습니다. 통일독일이 1,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원죄의식 때문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통일과정이 한창일 때도 베를린 거리에 “Nie Wieder Deutchland”(통일독일 다시는 안돼)라는 구호가 여기저기 난무했겠습니까.

그에 비하면 한반도는 그야말로 통일의 천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북한은 통일을 체제 존립의 목적으로까지 삼고 있고, 남한에서도 어쨌든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데는 좌우파가 따로 없습니다.

그런데 왜 독일은 통일이 되고, 한반도는 아직도 통일 열병을 앓고 있는 것일까요. 여러가지 답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남북한 국민들간에 체제 가치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체제가 개인과 민족의 삶의 질을 끌어 올릴 것인가에 대한 대체적인 방향이라도 정해지지 않는다면, 체제통합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고, 체제통합없는 국가통일은 사상누각일 뿐이지요.

남북한간에는 고사하고 남한 내부에서조차 이 문제가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가를 여러분 눈으로 직접 한번 확인해 보십시오. 이곳 사이트의 ‘탈북인과의 대화’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뜨거운 논쟁을 잠시만 살펴 보십시오.

‘북한도 민주 체제고 다수의 북한주민들은 나름대로 행복을 느끼고 있다’는 ‘당황’씨의 주장에 대해 ‘황당’씨로 대표되는 탈북인들의 체험적 반론이 절절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논쟁의 과정에서 희망의 편린을 찾기도 합니다. 서로를 이해하려는 진지한 노력과 고민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작은 고민과 노력이 쌓여갈 때 큰 통일은 독일에서처럼 도둑고양이 같이 어느날 갑자기 우리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김현호 통한문제연구소장 hhkim@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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