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러 정상회담의 공동성명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은 탄도탄 요격미사일(ABM) 제한조약, 포괄적 핵실험 금지조약(CTBT) 등 국제핵(핵)협정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을 많이 했다는 점이다.

성명은 “72년 (미·소간에) 체결된 탄도탄 요격미사일 제한조약이 전략적 안정의 초석이며 핵무기 감축 및 비확산에 대한 국제적 노력의 중요한 기반이라는데 동의했다”고 밝히고 “이를 보존하고 강화하기를 희망한다”고 명시했다.

이는 한국이 미사일의 숫자를 제한한 ABM조약의 개정을 통해 미사일 제한을 없애 국가 미사일방어(NMD)체제를 구축하겠다는 부시행정부의 계획에 반대하고 미국 NMD계획을 비난해온 러시아의 입장을 편든 결과를 가져오고있다.

NMD를 둘러싸고 미·러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고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국익과 국제관계’ 등을 고려하여 찬반의 입장을 신중하게 저울질하고 그 판단을 유보하고 있는 판에 이른바 미국의 동맹이라는 한국이 아시아 동맹국가 중에서는 제일 먼저 미국의 NMD에 반대하는 러시아의 입장을 지지하고 나섰다는 것은 보통 중대한 사태가 아니다.

우리는 공동성명에 나타난 정부의 이같은 시각과 태도가 국익의 차원에서 또 국제관계나 한·미관계에서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해 지극히 회의적이며 동시에 우리 외교의 미숙성을 개탄해 마지 않는다.

우리는 미국의 모든 정책에 대해 찬반의 독립된 의견과 견해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국제안보와 국방문제에 관한한 전통적인 한·미우호관계나 한·미 방위조약을 감안해서라도 미국과의 견해차이는 신중히 다루고 항상 한단계를 두어 판단하는 것이 우리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

기회있을 때마다 ‘한·미공조’를 내세우던 김대중 정부가 왜 미묘한 문제에서 미국과의 의견교환없이 미국 반대쪽의 손을 들어주는 경솔한 선택을 했는지 지금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

이번 공동선언에 쓰여진 내용이 지난해 선진 8개국 정상회의 등에서 발표한 내용의 원용이라는 것이 정부당국자의 구차한 설명이지만 그때는 NMD계획에 적극적인 부시행정부가 들어서기전 얘기며, 그만큼 상황이 바뀌었다는 것도 고려했어야 했다. 러시아의 압력이 있었다면 그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김대통령이 며칠후면 미국을 방문하여 부시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게 된다. NMD에 대해 한국의 입장을 설명해야 하는 김대통령이 ‘한·러공동성명’처럼 ‘반대의 입장’을 밝힐 것인가, 아니면 논리를 바꿀 것인가, 무조건 미국에 따르라는 주장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대로 국익이 있고 입장이 있다. 외교는 그 「이견」을 멋있게 조절하는 기술이다.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