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분이 만나면 우리 아들이 돌아올 수 있을까…. ”

오는 6월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열린다는 뉴스를 보던 김삼례(75·여·인천 강화군 교동면)씨의 주름진 눈가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김씨는 아들 강희근(49)씨가 조기잡이 어선 동진호에 탔다가 87년 1월 15일 북한 경비정에 납치된 줄을 1년 넘게 몰랐다. 노모가 충격 받을까 봐 “원양어선 타서 소식이 뜸하니 걱정 마시라”고 남은 자식들이 둘러대는 말만 믿었다.

스물 셋에 어선 일 나서고는 1년에 두 번, 배 들어오는 1월과 8월에 잠깐씩 집에 들르던 둘째아들은 그러나 이듬해 가을까지 돌아오지 않았고, 그제서야 딸들이 “오빠 북한에 있다”고 털어놨다. 김씨는 “아무 말도 못하고 한참을 앉아있다가 정신을 잃었다”고 그 순간을 기억했다.

외지에서 식당일을 하며 몇 년을 버티던 며느리는 결국 소식이 끊어졌고, 이북땅이 보이는 교동도에서 남의 농사에 품을 팔며 손주 오누이를 키웠다. 어린 손주들에겐 아버지가 납북 어부란 사실을 10여년 숨겼다. 아무 것도 모르던 손자 현문(현문15·교동종합고1)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도 없냐고 놀림받고 돌아와 “우리 아버지는 어떻게 생겼는지 얼굴이라도 보고 싶다”며 울먹였을 적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고 했다.

“그 때 사흘 밤을 뜬눈으로 지샜지요. 북한 땅이 눈앞에 보이는 바닷가에서 울기도 많이 했어요. ”

납북된 아들은 “젊을 때 자립하겠다”며 배를 탔다. 김씨가 아들을 마지막 본 것은 납치 며칠 전인 87년 1월 초. 인천 포구에서 만난 아들은 “겨울바다가 추우니 잘 덮고 자라”며 전해주던 이불을 받아들며 밝게 웃었다.

96년엔 동진호 선원 중 한 명이 북한에 생존한 사실이 확인됐지만, 그의 아들은 여전히 생사불명이다. 94년 김영삼(김영삼)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 발표 등 남북관계개선책이 발표될 때마다 ‘이번에는…’ 하면서 빌어 보았지만, 메아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음력 8월 생일 아침이면 아들이 없어도 흰 쌀밥에 미역국을 끓이곤 하던 김씨는 이제 반백이 되었을 아들 소식이라도 듣고 죽는 게 소원이다.

김씨는 구김살 없이 자란 손주들을 아들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손녀 지선(20)은 지난해 고등학교를 마치고 인천으로 나가 무역회사 사원으로 일하면서 야간 간호학원을 다니는 예비 나이팅게일이고, ‘밝고 착실하고 공부도 잘하는’(중학교 생활기록부) 손자의 꿈은 컴퓨터 프로그래머.

동진호 선원 12명 등 현재 국내의 납북자는 총 454명(정부 발표). 이들의 가족들은 모두 김씨 가족처럼 북에 있을 남편과 아버지, 아들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

김씨는 11일 오후 걸어서 30분은 족히 걸리는 북쪽 바닷가에 나갔다. 바다 건너편을 향해 “희근아, 어서 돌아와 네 새끼들 장한 모습을 봐야지”라고 말하는 노모의 주름진 눈자위는 또다시 붉어져 갔다.

/교동도=이동혁기자 do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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