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평양 고려호텔에서 32년 만에 노모와 상봉한 북측 성경희(55)씨는 지난 69년 납북된 KAL 「YS-11」기 승객·승무원 51명 중의 한 사람이다. 창덕여고와 이화여대를 졸업한 성씨는 당시 대한항공에 입사한 지 1년 4개월밖에 안 된 신참 스튜어디스였다.

납북 전날인 69년 12월 10일 성씨는 서울발 제주도행 마지막 비행기를 탑승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여느 때와 달리 불길한 느낌에 사로잡힌 어머니 이후덕(77·서울 노원구 중계동)씨가 성씨를 붙잡았다.『다른 사람 대신 일하지는 말고 일찍 집으로 와라』고 신신당부했다.

다음날 비번이었던 성씨는 그러나 고교동창생이던 동료 여승무원 정경숙(56)씨의 『같이 가자』는 제의를 받고 강릉발 비행기에 같이 탑승했다. 다음날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딸 대신 저녁 으스름에 대한항공에서 사람이 찾아와 딸의 납북 소식을 전했다. 이듬해 2월 14일 승객 39명만 송환됐고 납치범 조창희를 제외한 11명은 현재까지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함흥이 원적지인 성씨는 납북 당시 북한에 조부모 등 친척이 거주하고 있던 월남가족이었다. 어머니 이씨가 48년 4월 젖먹이 성씨를 업고 먼저 월남한 남편을 따라 38선을 넘었던 것. 전매청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성씨의 아버지는 딸의 납치에 충격을 받고 「미친듯이」 송환활동을 하다 지난 79년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씨는 동독·미국 등의 적십자사에 『생사를 알 수 있겠느냐』며 수백차례 편지를 했지만 딸의 소식을 알 수 없었다. 이씨는 딸이 방송국에서 일한다는 소문을 듣고 혹시 얼굴이라도 볼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 「통일전망대」나 「남북의 창」 등 북한 관련 TV프로그램은 한번도 빼놓지 않고 지켜보았다고 했다.

이후 성씨에 대한 소식은 92년 독일유학생 출신 간첩 오길남씨가 자수하면서 처음으로 알려졌다. 성씨가 한국 내 지하방송으로 위장, 대남방송을 해온 「한민전」 산하 「구국의 소리」 방송에서 방송요원으로 일하고 있다는 것. 남한 출신을 감추기 위해 성씨는 ‘신서연’이라는 가명을 썼다고 오씨는 증언했다. 또한 북한 중앙당은 이들이 남한에 대한 애착을 버리도록 본인의 희망과는 달리 성씨를 북한 출신의 김일성 종합대 교수와 강제 결혼시켰다고 오씨는 말했다.

『납치일과 비행기 편명에 들어 있는 「11」이 가장 싫은 숫자』라는 어머니 이씨는 방북 전날인 25일 『시집 보낸 딸을 만나러 가는 기분으로 간다』고 했다. 이씨는 딸의 결혼 소식에 사위에겐 반지와 시계, 손자와 손녀들에겐 내의와 스웨터를 준비했다.

딸에겐 아버지가 30년 전 사둔 시계·목걸이, 그리고 며칠 걸려 손수 뜬 숄·코트 등을 준비했다. 가장 공들여 준비한 선물은 앨범과 편지. 그리고 남에 있는 성씨의 남동생 2명과 여동생 2명, 그리고 조카 10명이 성씨에게 보내는 편지를 준비했다.

“얼굴 맞대고 이야기할 시간도 없어 절대로 울지 않겠다”던 이씨는 상봉장에서 딸을 보자 거의 혼절할 정도로 통곡했다.



( 평양=공동취재단 ) ( 김민식기자 callin-u@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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