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의 개인 필름 라이브러리나 마찬가지인 '북한 영화문헌고'에는 1만 5천여편에 달하는 세계 각국의 영화가 수집되어 있다. 습도와 온도 조절 장치(항온항습장치)에 완벽을 기한 지상 3층에 지하 보관소까지 갖춘 이곳에는 사회주의 국가의 영화는 물론 헐리우드 영화, 일본 영화 등을 국가별로 보관하고 있다.
◇사진설명: 조선영화촬영소의 일제시대 거리 모습.

한국의 영화도 300편 이상이 따로 보관되어 있고, 제작연도, 출연배우, 감독, 제작진의 이름까지 자세하게 기록한 목록이 따로 비치되어 있었다. 한국에서는 이미 없어진 것으로 되어 있는 나의 작품<빨간 마후라>의 일부,<다정불심> <내시> <열녀문> 등 10여편의 원판까지 이곳에 와 있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

심지어는 과거 우리 영화인들이 한국영화진흥공사를 통해 동남아로 수출했다는 필름들이 고스란히 헐값으로 이 문헌고에 들어와 있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영화의 보관에 거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던 한국 정부의 영화 정책 부재와 영화계의 현실이 너무나도 서글펐다. 북한의 영화문헌고는 확실히 부러운 시설이었다.

문헌고에 보관된 필름들은 김정일이 이른바 '100호 물자' 외교행랑 등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수집한 것들이다. 이를 위해 '영화 후진국'인 북한은 한국보다도 10년이나 앞서 FIAF(국제영상자료연맹)에 가입했다. 회원국이 되면 영화수입이 비회원국에 비해 쉽기 때문이다.

'북한 영화문헌고'에는 번역사, 녹음기사, 성우, 영사기사, 자막사 등 250 명이 넘는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다. 이들이 엄청난 노력과 돈을 들여 우리말로 번역, 녹음한 영화가 7천여 편에 이른다. 이 대부분을 김정일이 봤다고 치면, 20년 가까이 하루도 빼지않고 매일 한편 꼴로 영화를 본 셈이 된다. 실로 엄청난 양이다.

내가 보기에는 김정일이 영화를 좋아한 것은 오래 전부터의 일이지만, 필름 라이브러리를 만든 것은 그가 조선노동당 문화예술부장을 거쳐, 선전 선동부장이된 70년대 초로 추정된다. 이어서 영화를 광적으로 모으고, 보기 시작한 것은 '7·4 남북 공동성명'이 발표된 1972년경부터로 보인다. 이 무렵 그가 후계자로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최고의 영화 공부는 좋은 영화를 많이 보는 것이다. 결국 이 문헌고는 김정일의 '영화 공부방'인 셈이다. 문제는 이 방대한 자료를 김정일이 독점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주의 국가의 영화 중 일부는 텔레비전을 통해 일반에게도 공개되지만, 그외의 필름은 김정일의 허가 없이는 감상할 수가 없다. 그러니, 김정일이 최고의 영화 전문가가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나는 김정일 덕에 많은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소련 영화는 거의 다 보았고, 쉽게 보기 어려운 인도, 쿠바, 이집트, 칠레 등의 영화를 보며 톡톡히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신필림’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기 시작한 이후에는 배우를 비롯한 영화인들의 교육을 위해 문헌고에 보관된 영화 중 100여편을 비디오로 만들어 교재로 삼기도 했다. 만일 김정일의 문헌고가 북한의 영화인들에게 자유롭게 개방된다면, 북한 영화발전의 큰 기폭제가 될 것이다.

해외를 마음껏 여행하기 어려운 김정일은 영화를 통해서 서방세계를 이해하려하는 것 같았다. 오죽 답답했으면 그랬을까. 그래서 나는 "영화는 어디까지나 허구의 세계이므로 영화를 통해서 서방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충고하고, ‘노마 레이’ ‘피스트’ ‘세일즈맨의 죽음’ ‘나무구두의 거리’ ‘크롬웰’ 등 꼭 봐야 할 작품들의 명단을 적어 주었다.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