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주민들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기는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다. 그나마 기회가 찾아오는 것은 ‘현지지도’ 때다. 이때 그를 만나기만 하면 ‘평생’이 보장된다.
◇사진설명: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98년 10월 양강도 대홍단군종합농장의 농업과학연구원 감자연구소를 현지지도하고 있는 모습.


현지지도는 불시에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6개월 전에 노동당 중앙위원회 참사실에서 일정을 결정한다. 그러면 현지지도를 받을 기업소나 농장, 군부대 등에서는 즉시 철저한 준비에 들어가게 된다.

윤이 나도록 깨끗이 청소하는 것은 기본이다. 낡은 건물은 수리하거나 새로 짓고, 기계도 새 것으로 교체한다. 어느 한 곳 흠잡을 데 없이 꾸려놓아야 한다.

이 때문에 현지지도를 받는 기관은 그동안 어려웠던 문제를 한몫에 풀 수 있는 행운을 거머쥔다. 무엇 무엇이 부족하다고 상부에 보고만 하면 우선적으로 풀어주기 때문이다.

현지지도 한 달 전부터는 분위기가 훨씬 삼엄해진다. 호위총국에서 파견된 수많은 요원들이 지도 행렬의 발길이 닿을 곳은 모조리 검열하고 경비를 서기 시작한다.

김 위원장은 현지지도 때 가까운 곳은 번호판 없는 자동차를 타지만 대개는 기차를 이용한다. 그가 탄 기차가 지나갈 때면 다른 기차들은 꼼짝을 못한다.

짧게는 몇 시간에서 길게는 대엿새까지 연착에 시달려야 한다. 행렬이 주택가를 지나가면 근처의 주민들은 커텐을 모두 내려야 하고, 내다보다가는 호위병들에게 낭패를 당하게 된다.

현지지도는 많은 주민들에게 불편을 주지만 특별한 몇 사람에게는 "배급 600g, 월급 60원"에 달하는 연금을 탈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된다. 70년대 초 유일사상 체제가 강화되면서 김일성 김정일과 단 한번이라도 악수를 하거나 대화를 나눈 이른바 "접견자"들에게 평생의 생활을 보장해 주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평양의 한 공업연구소 현지지도때 김정일 앞에서 기계 설명을 하기로 돼 있던 탈북자 김영숙(가명ㆍ59)씨는 그가 자신이 기다리고 있던 6층까지 오지 않고 4층에서 돌아서 버리자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보다 더 서럽게 울었다고 한다. 꽃다발을 전달하기로 돼 있던 한 젊은 여성은 혼절까지 했는데 뒤에도 충격을 회복하지 못해 "낙오분자"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함북 청진의 김책제철연합기업소에서 현지지도를 경험했던 조민수(가명ㆍ37)씨는 "신분이 좋지 않은 사람은 현지지도 때 공장에 얼씬도 못해 아예 하루 휴가를 받는다”고 말했다.

수령(김일성 김정일)의 절대적인 권위 때문에 현지지도 때 내린 교시는 설령 농담이었다 해도 고칠 수가 없다. 김일성이 사망 직전 현지지도때 황남 농촌경리위원장 허복덕을 "덕복이"라고 몇 번 부르는 바람에 나중에 아예 이름을 바꾸기도 했다.

평양 역포목장 9작업반장 김명덕의 경우 김일성이 "9작업반장 김명덕"을 몇 번 언급하는 바람에 나중에 목장이 작업반 수를 6개로 줄일 때도 김명덕만은 "9작업반장"이라는 직함을 유지하게 했다.

이름에 관한 에피소드는 김정일위원장도 여러 차례 남겼다. 99년 양강도 대홍단군을 현지지도 하면서 한 임신부에게 “아들을 낳으면 대홍이 딸을 낳으면 홍단이라고 이름을 지으라”고 하거나, 같은 해 함남 광명성제염소를 현지지도하면서 새로 태어날 아이에게 "소금"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다.

현지지도가 끝난 뒤의 후속작업도 복잡하다. 현지지도때 내린 교시를 문건으로 만들어 전국적으로 배포, 일반 주민들도 암기해야 한다. 현지지도 사적비를 만들고 해마다 기념식을 가진다. 조선예술영화촬영소나 김책공대 등 몇 개 대학에는 현지지도말씀판이 설치돼 있다.

김일성은 사망때까지 약 8000 번, 1만8000 단위를 현지지도 했고, 김정일은 1963년 10월 영화필림복사공장과 중앙제2백화점을 시찰한 시점부터 99년까지 3900여 일을 현지지도 하는 데 보냈다는 것이 북한의 공식적인 발표다.

관료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고 통치자가 현장에서 직접 모범을 창출한다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현지지도는 1960년대까지 수령의 권위에 힘입어 주민들의 에너지를 최고도로 이끌어올려 북한경제를 급성장시키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천리마운동, 대안의 사업체계, 청산리 방법, 숨은영웅따라배우기 운동 등도 현지지도를 통해 시작됐다. 최근 김정일은 자강도 현지지도를 통해 이곳의 도 소재지인 강계를 자력갱생의 모델로 간주, ‘강계정신"을 강조하기도 했다.

현지지도는 여전히 북한의 가장 중요한 통치술로 여겨지지만, 주민들에게 주는 ‘감동’은 갈수록 떨어지고 형식화되고 있다는 것이 탈북자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김미영기자 miyou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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