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형제산구역 신미동에 있는 애국열사릉 전경

평양 서북쪽 교외 형제산구역 신미동 자그마한 야산의 양지바른 언덕바지에는 애국렬사릉이라 불리는 묘원이 있다. 27정보의 부지에 터를 잡은 이곳은 우리의 국립 현충원에 비견되는 곳이다. 크게 윤환선(순환선)도로와 묘비구역으로 나뉘어 있고 묘비구역에는 약 400개에 이르는 하얀 비석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조국의 해방과 사회주의건설, 나라의 통일위업을 위하여 투쟁하다가 희생된 애국렬사들의 위훈은 조국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묘비구역 입구 정면 추모비에 새겨진 문구는 이곳에 잠든 인물들의 면모를 대강이나마 짐작케 한다. 묘비의 상단에는 묻힌 이의 돌사진이 부착돼 있고 그 아래로 이름과 생전의 신분, 생몰 연월일이 차례로 새겨져 있다.

돌사진은 1998년 4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변색되지 않는 천연화강석에 고인들의 생전모습을 새겨 붙이도록 지시함에 따라 묘비에 첨부된 것이다. 지난해 8월 이산가족 방문단의 일원으로 서울에 온 시인 오영재씨가 가족들과 만난 자리에서 남한에 있던 어머니가 예전에 자신에게 보냈던 사진을 돌에 새긴 돌사진을 보여준 적이 있었는데 애국열사릉의 묘비에 부착된 것과 같은 기법으로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화강석에 작은 바늘 같은 것으로 정교하게 쪼아서 실제 모습처럼 형상한 것으로 얼마 전 방북했던 미술계 인사들이 "사진인줄 알았을 정도로 정교했다"며 그 솜씨에 놀라움을 표시했다고 한다.

애국열사릉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안치돼 있다. 북한에서는 삼척동자도 아는 유명 인물이지만 남한에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은 사람도 있고, 이름만 대면 금방 알아볼 수 있는 저명 인사들의 면면도 눈에 띈다.

북한 아나운서의 대명사인 인민방송원 이상벽, 70년대 중반 세계선수권대회를 2연패했던 탁구선수 박영순(여), 현란한 바이얼린 연주로 주민들이 뇌리에 큰 자취를 남긴 인민배우 백고산, 잠학분야 개척자로 박사1호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 계응상 등등….

일제 때 카프의 일원이었고 해방후 60년대까지 북한 문학계의 양대산맥으로 군림했던 한설야와 이기영, 수령형상문학의 효시로 꼽히는 장편서사시 '백두산'과 '김일성장군의 노래' 노랫말을 써 혁명시인의 칭호를 들었던 조기천과 이찬도 여기 묘비를 두고 있다.

내각 부수상에 올랐던 '임꺽정'의 저자 홍명희, 마르크스주의 경제사학자이면서 초대 교육상을 역임한 백남운, 초대 내각 무임소상을 지낸 국어학자 이극로, 변호사 출신으로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거쳐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으로 있다 대령강에서 익사한 허헌 등 월북지식인들도 이곳에 뼈를 묻고 있다.

김규식 조소앙 유동열 윤기섭 조완구 오하영 최동오…. 6·25 때 납북된 이들이 애국열사릉에 잠들어 있다는 사실은 다소 의외로 느껴질 수 있다. 북한은 이들이 모두 자의로 월북했고 이후 북한정권에 적극 협조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른바 '모시기공작'을 통해 데려갔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같은 납북인사이면서도 안재홍·정인보·이광수 등 일부 인사들은 평양의 다른 지역에 있는 '특설묘지'에 안장돼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이곳에는 제주 4·3사건 당시 무장대를 이끈 두 주역 김달삼(본명 이승진)과 이덕구, 해방직후 서울에서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라는 소책자를 써서 훗날 북한이 '타도제국주의동맹' 신화를 창출하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 최일천의 묘도 있다. 남로당 지하당 총책 김삼룡, 지리산 빨치산대장 이현상, 진보당 당수 조봉암, 통일혁명당사건의 장본인 김종태 등도 그 대열에 끼어 있다.

남로당 지하조직을 이끌었던 두 인물 가운데 김삼룡만 묘가 있고 이주하의 묘가 보이지 않는 것은 의문으로 남아 있다. 최일천 김삼룡 이현상 조봉암 김종태 등은 시신이 북에 있을 수 없는 인물들로 엄밀히 말하면 허묘인 셈이다. 애국열사릉에는 이들과 같이 허묘 또는 가묘의 형태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사들이 적지 않다. 이는 생물학적인 죽음보다 정치적 생명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는 북한 특유의 생사관의 소산으로 볼 있다.

북한은 일제 때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했던 일부 인사들도 이곳에 안치하고 있다. 1920년대와 30년대 초 김좌진·홍범도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남만주일대를 포효했던 항일용장 양세봉(梁世鳳, 일명 梁瑞鳳) 장군이 대표적 사례. 만주에 있던 그의 유해를 1961년 평양 교외에 안장했다가 86년 9월 애국열사릉이 완공되자 이장했다.

애국열사릉에 안치된 인물 가운데는 특이한 인연으로 맺어진 사람들도 있다. 홍명희-홍기문, 최동오-최덕신은 부자, 허헌-허정숙은 부녀지간이다. 유동열-최동오는 사돈이며, 안중근 의사의 조카인 안우생-김달삼, 전 부주석 김병식-안우생도 사돈지간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에는 애국열사릉 외에 혁명열사릉이라는 국립 묘지가 하나 더 있다. 평양 대성산 주작봉 마루에 위치해 있어 평양 시가지를 한 눈에 굽어볼 수 있는 이곳에는 130여 혼령들이 잠들어 있으며 위치나 규모 등에서 애국열사릉을 훨씬 능가한다.

여기에는 과거 김일성 주석과 함께 항일빨치산 투쟁을 했거나 그와 직간접으로 연계를 맺고 활동한 인물이 묻혀 있다. 김 주석 사후에는 인민무력부장을 지냈던 오진우와 최광 두 사람만이 이곳에 매장됐다. 같은 공산주의자라 하더라도 국내파(남로당계), 연안파, 갑산파 등 김 주석의 정치적 권위에 도전했다가 숙청된 인물들은 어디에도 그 종적을 찾아볼 수 없다.

북한에서는 생전에 그가 어떤 지위를 누리고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가 하는 것 못지 않게 죽은 후 어디에 묻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관심사로 되어 있다. 사망 후 시신이 어디에 안치되느냐 하는 것이 그에 대한 북한당국의 정치적 평가를 가늠하는 또 하나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혁명열사릉에 묻혔다면 그는 분명 선택받은 인물이다.

애국열사릉의 경우는 반드시 그렇다고 보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여기에는 북한 당국의 정치적 평가 외에 남북한 체제정통성 경쟁의 긴장이 비껴있기 때문이다.
/김광인 기자 kk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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