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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북지식인들의 행로] (7) 백남운
조영복  |  qbread@hana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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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1.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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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9월 9일 출범한 북한 첫 내각. 앞줄 가운데가 수상 김일성이고, 그의 오른쪽과 왼쪽에 부수상 박헌영과 홍명희가 섰다. 교육상 백남운은 사진이 흐려 알아보기 힘들지만 가운데 줄 왼쪽에서 세 번째로 보인다.


정치가로 교육가로
'화려한 삶'
1948년 9월 9일 북한 첫 내각이 출범한다. 그 때의 빛바랜 사진속에는 가운데에 수상 김일성, 그 옆에 부수상 박헌영이 자리하고 있다. 그 뒷편에 당대 최고의 경제학자로서 교육상이 된 백남운의 모습이, 사진이 낡아서인지 더욱 흐릿하게 보인다.

◇북한 잡지 '금수강산' 97년 6월호에 실린 백남운(白南雲).


우리나라에서 원시고대 사회를 처음으로 사적 유물론의 시각으로 분석한 "조선사회경제사"를 저술함으로써 좌파 경제학자로서의 독보적 역량을 과시했던 백남운은 해방공간에서 여운형 등과 함께 중도좌파 노선을 견지하다 북으로 가 월북지식인중 가장 성공한 정치인으로 변신하게 된다. 불행히도 그가 북에서 학자로서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는 정확히 확인하기 어렵다.

김일성을 대표로 한 북한 초대 각료들은 1949년 2월 소련을 방문, 경제와 문화 분야 전반의 협력관계를 구축한다. 부수상 홍명희 박헌영, 문화선전상 허정숙 등이 포함됐다. 일행은 차이코프스키음악당에서 소련국립무용단의 공연을 보고 그날 밤에는 박헌영의 장녀가 추는 몽고식 무용을 즐기기도 했다. 김일성과 박헌영의 최고 밀월기라고 할 만했다.

이때의 소련 방문 인상을 백남운은 1년뒤 "쏘련인상"이라는 한 권의 책에 남겼다. 스탈린과 김일성의 사진이 좌우로 속표지를 우뚝 채우고 있는 이 책에는 저자 자신의 월북 동기를 추정할 수 있는 그의 내면 풍경이 음화처럼 그려져 있다.

그는 머리말에서부터 끝 부분에 이르기까지 "평소에 동경하던 지구상의 신세계""인류 역사상 가장 선진적인 유일 사회주의 소비에트 국가""새 인간타이프가 발전하고 성장할 수 있는 유일한 혁명국가"라는 긴 수식어와 격앙된 수사법을 통해 소련을 그려 나갔다. 그에게 소비에트 인민의 생활은 경제적 윤택함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이 예술과 결합돼 있는, 최고의 문명생활이었다. 그의 흥분된 호흡을 따라가기가 가파를 지경이다.

소련의 무엇이 그를 이토록 격앙시키고 전율시켰던 것일까. 그가 그토록 동경해 마지 않던 소비에트란 바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예견한 미래의 원시공동체 사회의 목가적 풍경을 그대로 실현해 낸 곳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각 개인은 제가 하고 싶은 대로 오늘은 이 일, 내일은 저 일,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고, 저녁에는 소를 몰고, 저녁 식사 후에는 비평을 하면서도, 사냥꾼으로도, 어부로도, 목동으로도, 비평가로도 되지 않는 사회."

정치가이기 전에 학문의 과학성과 객관성을 철저하게 견지하고자 한 이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가 본 것은 일종의 환각이거나 신기루였을까.
월북 지식인들이 진정으로 가고자 했던 최종 목적지는 실재하는 국가 소련이나 북한이 아니라, 이념의 고향으로서 ‘이상적 사회주의 조국’ 소련이었고, 그곳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예술과 사상의 넘쳐 나는 봇물을 풀어놓기를 갈망했다. "쏘련인상"은 그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백남운이 마르크스주의 사상에 접하게 되는 시기는 일본 유학시절이다. 그가 유학한1910~1920년대 일본 사상계는 "다이쇼(대정)데모크라시" 시기여서 사상운동의 난숙기에 접어들어 있었다. 그들은 기독교사회주의 사회개량주의 사회민주주의 노동조합주의 셍디칼리즘 무정부주의 등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얽혀있던 온갖 사상 체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동경(東京) 상대에 재학중이던 백남운은 직접적인 실천운동과는 다소 거리를 두고 문헌을 통한 개인적인 학습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학문연구를 통해 자신의 사상체험을 내면화 해 갔고, 그것은 구체적으로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우리 역사에 적용한 저서("조선사회경제사""조선 봉건사회경제사" 등)를 통해 입증된다.

그의 저서에 대해 배무기 울산대 총장(경제학)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기계적적으로 조선사회에 적용했다는 비판이 있지만 그 시대 우리의 학문적 수준이나 두께에 비해 볼 때 한국사 연구를 정치경제사의 입장에서 처음으로 집대성했고, 학문 연구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렸다고 할 수 있다” 면서 “그의 한계는 학문적 사상적 한계라기보다는 시대적 한계였다"고 평가했다.

해방공간의 나라만들기 열풍은 그를 정치 현실로 내몰았다. 그는 남조선신민당을 창설하고 사회혁명 세력이 연합성을 띠어야 한다는 이른바 "연합성신민주주의론"을 주창한다. 그의 노선은 그러나 남북한 양쪽으로부터 분열주의자, 우익기회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아야 했다. 이 시기 정치 활동을 전개하면서도 그는 경성대학 재건에 관계하고, 학술원 창립, 조선경제학회 창립 등 학자로서의 활동에도 주력하였다.

그는 한때 정계은퇴 선언을 하기도 했으나 1947년 근로인민당(위원장 여운형)이 창당되고 부위원장을 맡으면서 복귀했다. 그러나 그해 7월19일 여운형이 암살되고 좌익 검거가 본격화 되면서 그도 동료들과 함께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된다. 검거에서 풀려난 후 그는 북으로 향했고,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한 후 그대로 눌러 앉는다.

그는 북에서 8년간 교육상을 지낸 후 과학원 원장(56년), 최고인민회의 의장(67년), 조국전선 의장(74년) 등을 역임하고 79년 85세로 사망했다. 그의 회갑 때에는 김일성이 그의 집을 찾아가 축하했으며, 그의 이름은 애국열사릉과 통일전선탑에 새겨져 지금도 인민의 추억속에 전해지고 있다고 북한은 기록하고 있다(잡지 "금수강산" 97년 6월호). 그는 "김일성동지의 영웅적 위업"이라는 미완의 원고를 남기기도 해, 정치적 성공의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그가 북한 체제 속에서 자신의 학문적 과제와 현실이 행복하게 조우하는 황홀한 경험을 누렸는지, 아니면 그 둘의 충돌속에 끊임없는 내면의 고통을 감내해야 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조영복 문학평론가 qbread@hananet.net

◈백남운(1894(?)~1979) 누구인가

전북 고창 출생. 남한의 기록들은 그의 출생연도를 대개 1894년으로 적고 있으나 북한 조선대백과사전은 1897년으로 적어 놓았다. 호는 동암(東岩). 수원농림학교 졸업후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으로 가 1925년 동경(東京)상과대학을 졸업했다.

연희전문대학 교수를 거쳐 1945년 조선학술원 위원장을 역임했고, 경성대학 법문학부 경제학 교수를 지냈다. 1946년 조선독립동맹 경성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서 정계에 들어갔고, 이 조직이 조선신민당으로 개칭되면서 북한은 김두봉이, 남한은 그가 위원장을 맡았다. 남로당 준비위원회 결성을 계기로 박헌영과 대립했다.

월북 후 북한에서 교육상, 최고인민회의의장 등을 역임했고 1979년 사망 당시 노동당 중앙위원 서열 46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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