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이 당의 조직·선전비서로 임명돼 정치적 비상(비상)을 시작한 73년, 김 대통령은 도쿄(동경)에서 중앙정보부에 납치돼 서울로 끌려와 80년대 중반까지 가시밭길을 걸었다.
남·북한은 72년의 공동성명과 남북대화를 빌미로, 그해 각각 권력 강화를 위한 헌법 개정을 통해 오히려 체제 대결로 치달았다. 김 대통령은 이런 역사적 흐름의 피해자였고, 김정일은 수혜자였던 셈이다. 6월 평양 회담에 관해 남측이 발표한 ‘남북합의서’는 ‘남북 정상회담‘이라고 표현했으나, 북측이 발표한 ‘북남 합의서’는 ‘북남 최고위급회담‘이라고 했다.
북한은 98년9월 헌법을 개정하면서 우리의 대통령에 해당하는 ‘국가주석’직을 폐지하고, 국가주석이 가졌던 ‘국가의 최고의 직책’(국방위원장)으로서의 역할과 대외적인 ‘국가대표’(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역할을 분리, 각각 김정일과 김영남(김영남)이 나눠 맡았다. 이에 따라 김영남은 작년 6월 ‘국가대표’ 자격으로 중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의 ‘최고위급’이 김정일이고, 남북 정상회담은 김 대통령과 김정일간의 회담이라는 사실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김정일은 조선노동당 총비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당 중앙군사위 위원장으로, 북한의 모든 권력이 그에게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94년 김일성 주석이 정상회담에 합의할 때도 ‘북남 최고위급 회담’이라는 표현을 썼다.
/김연광기자yeonkwang@chosun.com
김대중대통령과 김정일국방위원장 비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