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로 몰락한 고집센 현실주의 소설가
임화 숙청 주도 10년도 못돼 같은 운명의 길로

월북 문인 중 최고의 지위를 누리던 한설야는 1963년 2월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자강도의 한 협동농장으로 추방되었다. 당 문화부장, 문예총위원장, 교육상, 교육문화상, 작가동맹위원장,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을 지낸 그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순간이었을 것이다.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시절 이론과 소설창작 양면에 단연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었던 그는 조선문학가총동맹의 위원장이 되면서 이미 거물급 정치인으로서 북한 권력의 중심에 서 있었다. 임화(1953), 이태준(1956)의 숙청을 주도한 한설야에 대한 김일성의 총애는 흔들림이 없는 듯 보였다. 그러나 임화가 숙청된 지 10년이 못돼 자신도 비슷한 운명에 놓이게 된 것이다.

낡은 사진 속의 한설야는 자존심과 신념으로 뭉친 강고한 유물론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 함흥출신 한설야는 자신을 '낭만의 빈곤'을 가진 '북방인'으로 규정하곤 했다. 이 북방인적 혈기는 경기고를 다니다 서울서 함께 살던 서모와 싸우고 고향에 있는 함흥고보로 전학을 해버린다거나, 1919년 함흥법전 시절 동맹휴학사건으로 제적당하는 사실 등과도 통한다. 카프 문단 내 아나키스트들과의 격렬한 논쟁, 카프 해산 성명서 제출거부, 해방 후 임화 중심의 조선문학가동맹 참가 거부 등은 그의 신념과 고집이 맞물린 결과일 것이다.

한설야는 고향(함흥)에서 해방을 맞았다. 서울에 본거지를 둔 임화, 이태준 등과는 이념적 사상적 차이로 갈등을 겼었고 그것이 끝내 북한 체제에 남게 된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한설야가 ‘과도기’ ‘황혼’ 등을 통해 일제 식민지시대 노동계급의 문제와 지식인의 양심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룰 수 있었던 것은 '낭만'이 아니라 '현실'이나 '사실'을 뒤집어 볼 수 있는 '역설적 지성'의 힘이었다. 이는 그가 소설가로서 현실주의 원칙을 지킬 수 있었던 요인이기도 했다. 그의 소설은 카프문학 전체를 통해서, 그리고 북한의 50년대 소설 미학의 표준이었다. 다른 원로작가 최명익이나 이기영이 역사소설로 후퇴하면서 작가적 생명을 유보하고 대신 생존을 보장받았다면, 한설야는 끝까지 리얼리즘적인 작가정신을 잃지 않고자 했다. 이것이 북한 체제에서도 ‘승냥이’ ‘설봉산’과 같은 현실주의 소설이 가능했던 이유이다.

그는 평소 끝없는 호인이지만 화가 날 때면 원숭이 같은 얼굴로 닥치는대로 욕을 퍼붓는 불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 양면성이 소설가로서의 한설야의 내면적 욕망을 고집스럽게 달구었다. 그 고집은 북한 문인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전해지는 한 일화에도 나타난다. 한설야에게 미련이 다소 남아있던 김일성은 총살 직전 마지막 호의로 '송아지 고기'를 보낸다. 수용소 관리인이 '수령님이 보낸 것'이라 알려주자 한설야는 '이런 송아지 고기 풀 내 나서 안 먹소'하고 식당을 나가 버린다. 이 일화가 사실인지 아닌지 알 길은 없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한설야'라는 인간과 별반 다르지 않다. 머리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죽음의 마신과 대면한 한설야의 눈빛을 상상해 보자. 그는 '처음 자신이 뜻한 길을 종신토록 감'으로써 바로 그 '빛나는 것'을 얻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한설야였기에 이념인으로서의 그의 선택은 월북까지 이어졌고 한국경향문학사에서 빛나는 현실주의 작가로 남게 되었던 것이다. 1963년 숙청 이후 그의 사망 시기등은 정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한설야 숙청시 현덕, 박팔양, 민병균 같은 문인뿐 아니라 신불출(월북 만담가), 임선규(배우 문예봉 남편) 등도 제거되었다. 당시 작가동맹 정동맹원이 400명 정도였고 한설야 숙청으로 제거된 작가가 90여명에 이르렀다는 기록은 한설야의 문단적 정치적 위치가 어떤 것이었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한 기록은 한설야가 월북 시인 민병균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을 전한다. '나도 내 자신 문학을 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배에 기름진 자들을 위해 사는 것은 그만했으면 된 줄로 안다. 때는 늦은 감이 있지만 남은 여생을 나 스스로를 위해 살아보겠다'고 썼던 것이다. 한설야를 제거하기 위해 소집된 문학예술총동맹 총회에서 김창만은 이것이 김일성과 당에 대한 한설야의 철저한 배신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소설가로서의 한설야의 내면은 분명 '자신의 문학을 위해' 살고 싶다는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이 진정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인지, 정치인으로서의 자기 삶의 부정인지, 월북한 것의 후회인지는 알기 어렵지만, 때는 그 순간에도 늦었던 것이 아니었다. 정치가로서의 몰락은 예견된 것이었지만, 소설가로서 한설야의 삶은 실패한 것이라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설야(1900~1963?) 누구인가?

함남 함흥 출생으로 식민지 조선문학의 한 기둥을 이루었고, 해방 후 북한 문학의 성장과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교육문화상을 지내는 등 정치적으로도 승승장구했으나 결국 반김일성파로 몰려 숙청당했다. 본명은 한병도.

1918년 경기고에 입학해 박헌영과 동기동창으로 친하게 지냈지만 나중에는 적이 됐다. 함흥고보로 전학해 졸업한 후 일본 니혼(일본)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했다.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 결성을 주도했고, 이 당시 ‘과도기’ ‘숙명’ 등의 단편과 장편 ‘황혼’을 썼다. 1948년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피선되었고, 이후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형상화한 장편 ‘력사’로 인민상을 수상하였다. ‘설봉산’은 북한에서 쓴 그의 대표작으로 1930년대에 실제 있었던 사건을 토대로 철저한 계급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씌어진 것이다.

/조영복 문학평론가 qbread@hana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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