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통한 "남북이념 통합 꿈" 전쟁에 꺾여
포로교환때 북행...정치 외면 "화가의 길" 고집

이쾌대(李快大). 특이한 이름만큼이나 우리에게 아직 낯선 인물이다. 그러나 월북 예술인의 발자취를 찾는 여정에서 그의 존재를 피해 가기란 어렵다. 그의 그림은 남북한에 걸쳐 우뚝 솟은 거봉의 면모를 보인다. 해방공간에서 남북한 미술을 아우르는 독창적인 미학 이념을 만들어 낸 유일한 인물인 그가 우리에게 잊혀진 것은 전적으로 월북 화가라는 이력 때문이다.

역동적인 힘과 생명의지로 번득이는 조선 민중들의 나신상을 그린 「군상」시리즈1-4(1944~1948년 제작)는 위대한 화가의 손이 아니라면 결코 완성될 수 없는 대작들이다. 서구적인 지성과 동양적인 감수성의 조화, 향토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색채의 강렬함을 특징으로 하는 이 작품들은 해방공간에서 나라 만들기의 열망이 얼마나 강렬한 것이었던가를 상징하고 있다. 그의 대표작 「군상1-해방고지」에서 화면은 왼쪽의 날아갈 듯한 두 여인의 자세와 그것을 맞으러 튀어나오는 듯한 남녀의 동작에서 역동적으로 출렁인다. 인물들의 살아있는 동작과 표정은 절망과 환희와 희망으로 이어지면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잇는 하나의 역사를 구성한다. 미술평론가 최석태는 “당시 제국주의 식민지배하의 동아시아에서 거대한 화폭에 이같은 스펙터클한 장면 묘사를 담아낼 수 있었다는 것은 놀라울 따름이며, 작가의 패기와 역량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평했다.

왜 이쾌대만이 역사의 목소리를 듣고 강렬한 서사시적 에너지를 저장할 수 있었을까. 그는 해방공간이라는 광망한 바다에서 서사시적 감수성으로 이 대작들을 그려 나갔다. 다른 화가들이 이념과 정치, 권력투쟁의 파고에 휩쓸리고 있을 때 그는 화가의 길을 고집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논쟁에 휘말린 당시 화가들이 뚜렷한 작품을 내놓지 못한 데 비해 그는 철저한 화가의 길을 지킴으로써 당대의 삶의 모순과 현실에 눈뜰 수 있었다. 그는 그림을 통해 '새로운 나라 만들기'의 이념을 구체적으로 형상화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쾌대의 선택은 역사가 한 개인에게 가하는 폭력과 위악을 보여준다. '이념의 친구들'을 따라 북한을 선택했던 좌파 지식인들과는 달리 그의 월북에는 사상성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그는 해방공간에서 뚜렷한 사상의 궤도를 보여주지 않았고, 이념적 성향은 좌파가 아니라 중도에 가까웠다.

광복 이후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한 그는 반공포스터전에 참가하는 등 정치활동을 강요당한다. 그러다 6·25가 터지자 어머니 병환 때문에 피난을 가지 못하고 인민군 치하에서 이번에는 스탈린과 김일성 초상화를 그린다. 그는 서울이 수복되기 직전 북으로 가다가 국군에 붙잡혀 부산 100수용소로 보내졌다. 그가 왜 북으로 향했는지 그 이유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마도 인민군 치하에서의 행적에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 아닌가 짐작된다. 그림을 좋아했던 미국인 수용소장의 배려로 그는 그림을 그리고 아내에게 편지를 전할 수 있었다.

그는 서울의 아내와 아이들을 곧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듯 "내 맘은 지금 우리집 식구들과 모여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썼다. 아끼던 색채, 책상, 헌 캔버스, 그림틀을 처분해 아이들을 굶주리지 않게 하라는 당부를 남기고 이 마음 따뜻한 가장은 그러나 포로 교환시 북쪽으로 가게 된다.

북한에서의 그의 활동은 다른 월북 화가들에 비해 미약했던 것 같다. 서구적인 감각과 민족주의적인 시각이 조화된 그의 화풍이 '사회주의적 현실주의'라는 북한 미술 테제와 갈등을 일으켰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월북은 늦게 이루어졌고 화가로서 그의 성향은 비정치적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이것이 북한에서의 그의 삶을 안정하게 지탱해 주었다. 그는 사회주의 이념을 좇아 북한을 선택한 사람들과는 달리 권력투쟁에서 비켜나 있었다.

북한 리재현이 1999년에 쓴 ‘조선력대미술가편람’(문학예술종합출판사)은 '리쾌대'에 대해 "북과 남, 해외에 널리 알려져 있는 미술가"라고 적고 있다.

이쾌대는 월북 후 위병을 심하게 앓은 듯하다. 몸을 보전할 수 없었던 그는 제자 이병호의 집에서 기식하면서 몇 점의 그림들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대대장고지방어전투」(1955), 「박연초상」(1956), 「우의탑벽화」(1958),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1961), 「송아지」(1961) 등이다.

이쾌대는 1965년 병으로 사망했다. 그가 그림을 통해 이루려던 남북한 이념의 통합안도 미완인 채로 영원히 역사의 한 장으로 남고 말았다. 「군상1-해방고지」는 위대하지만 분단의 그늘 아래서는 그래서 여전히 미완의 대작일 수밖에 없다.

------------------------------------- 이쾌대(1913~1965) 누구인가 ------------------------------------- 이쾌대는 경북 칠곡에서 태어나 서울의 휘문고보를 졸업한 뒤 1934년 일본 동경제국미술학교(현재 무사시노미술학교) 에 유학, 1939년 졸업했다. 임화(림화)가 주도한 조선문학건설본부 산하의 미술동맹에 속했으나 곧 이중섭 등과 함께 중립적 미술단체인 신미술가협회를 창립해 순수미술로 선회했다. 그의 화풍은 서구적인 지성과 방법론을 토대로 하면서도 향토적이고 민족주의적 색채가 농후했다. 이중섭의 향토주의적 그림과 맥락이 비슷하다.

그의 월북으로 남한에서 잊혀졌던 그의 작품들은 1988년 해금과 함께 재조명되고 서울과 지방에서 전시회가 잇달아 열렸다.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면서 화가였던 그의 형 이여성은 광복 후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했다가 북한에 남았다. 이쾌대의 그림과 행적에는 형의 영향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영복·문학평론가 qbread@hanane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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