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투쟁에 꺾인 좌파의 꿈...北문학사에 흔적없이 사라져

박헌영 따라 북행, 6ㆍ25 때 ‘인민항쟁가’작사
구치소서 안경 깨 자살 기도...끝내 총살형 당해

월북 시인 임화(1908~1953)의 생애는 남북한 문학사를 통틀어 가장 극적인 드라마가 될 것이다. 다다이즘 시인으로 출발해 마르크스주의 문학운동을 표방한 단체인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서기장까지 올랐고 해방 후 월북했다 결국 처형당한 임화는 불행했다고 말하기에는 그의 운명적 요소가 지나치게 짙다.

임화가 '어버이 같은' 박헌영을 따라 해주 제1인쇄소로 간 것은 1947년이었다. 그의 내면엔 모스크바 유학의 꿈이 불타고 있었고 계급문학을 사회주의국가 안에서 완전하게 실현한다는 야망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친일 경력과 박헌영에 대한 추종은 유학의 꿈뿐 아니라 북한의 문단조직을 장악하는 데 결정적인 장애가 된다. 지병이던 폐결핵은 그의 육체를 조금씩 갉아먹어 40대를 넘긴 그를 반백의 노인으로 만든다. 젊은 시절, 불량성과 모던보이적 기질을 가진 영화배우로도 활약하던 임화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말이 조소출판사 사장과 조소문화협회 부위원장이지 그는 겨우 오두막 같은 출판사에서 편집교정을 보거나 대남 선전선동용 문건을 만들고 있었다.

북한에서의 임화가 소용된 것은 단 한번, 6·25가 터졌던 순간이었다. 임화가 가사를 쓰고 김순남이 곡을 부친 ‘인민항쟁가’가 빨치산과 인민군의 유행가가 되어 전의를 불태웠다. 그는 문화공작대의 일원으로 낙동강 전선까지 갔다가 9월 인민군 퇴각 때 다시 북한을 향한다. 그 때의 전선체험은 ‘너 어느 곳에 있느냐’ ‘바람이여 전하라’ ‘흰 눈을 붉게 물들인 나의 피우에’와 같은 힘있고 격조있는 서정시로 남겨졌다. 이 시들은 영웅적 투쟁을 강조하는 다른 시들에 비해 감정의 기복이 매우 넓고 시인의 내면적인 목소리가 살아 있다. 이 작품을 두고 평론계는 일제히 '완숙한 금자탑적 작품'이라는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너 어느 곳에 있느냐’는 그의 딸 혜란에 대한 부성의 절절한 목소리를 깔고 있어 걸작으로 손꼽혔다.

그러나 이 서정적이고 육성 짙은 시인의 목소리는 권력투쟁의 와중에서 곧 사라질 운명에 놓인다. 카프 시절부터 정치노선과 문학이념의 차이로 갈등하던 한설야, 이기영, 송영 등은 김일성의 총애를 입고 임화의 문학을 철저하게 비판한다. 한설야의 오른팔 노릇을 하던 평론가 엄호석은 ‘너 어느 곳에 있느냐’가 장병들의 전의를 상실하게 하고 염전사상을 고취시키는 작품이라고 혹평한다. 전쟁 현실을 비관적으로 노래하면서 인민에게 비통, 연민, 향수라는 독소를 주입한다는 이유였다. 센티멘탈한 화자의 목소리가 애국주의를 파렴치하게 왜곡하고 영웅적으로 투쟁하는 어머니·아버지를 모욕했다는 한설야의 비판도 가세했다.

이 시기 임화는 이미 기지와 전략이 뛰어난 불량한 '발렌티노'가 아니었다. 최후의 자기를 지키고자 하는 날카로운 정신만이 그의 형형한 눈빛으로 살아 있었다. 북한에서 <민주청년> 문화부장을 지냈던 이철주는 1951년경 임화의 인상을 '사색적이면서 예리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는 정신이 살아있던 마지막 임화에 대한 증언일 것이다. 은밀하게 진행된 숙청작업은 당당한 마르크스주의 문인이 되고 싶었던 한 인간의 체념의 시작을 의미했다.

남침 실패의 책임을 전가할 대상을 찾던 김일성에게 박헌영의 남로당계는 좋은 대상이었다. 임화는 구치소에서 쓰고 있던 안경을 깨서 그 파편으로 오른쪽 손의 동맥을 끊고 자살을 기도한다. 1953년 8월 6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에서 임화는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형에 처해진다. 김남천, 이승엽, 이원조, 이강국, 설정식 등과 함께였다. 임화의 나이 45세.

임화의 죽음을 통곡한 유일한 사람은 그의 두 번째 아내이자 소설가였던 지하련이었다. 그녀가 만주에서 달려왔지만 임화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어 실성한다. 임화에 대한 비판은 1953년에서 56년에 이르기까지 김남천, 이태준 등 문학가동맹 문인들에 대한 반종파투쟁의 연장선상에서 계속된다. 이후 임화의 문학은 북한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조선문학예술사전이나 북한문학사에도 임화의 이름은 등재되어 있지 않다. 탈북 지식인들은 반동작가, 미제 고용간첩으로서의 임화만을 기억하고 있다. 임화의 문학은 사라지고 선전용 구호로만 그의 이름이 남은 것이다.

임화의 죽음은 인간이 결코 놓을 수도 없고 빠져나올 수도 없는 어떤 깊고 아득한 미망의 끝을 보여준다. 자신의 시에서 '애인처럼 그리운' 것이라 불렀던 그 ‘운명’은 다른 많은 월북 문인, 예술가, 사상가들에게도 조금씩 해당된다.

★임화 누구인가...1908-1953. 일제시대 좌파 문학을 이론적으로 주도한 대표적 시인이자 평론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카프) 서기장을 지냈다. 우리나라 근대문학사의 서술 방법을 정립했고, 이 과정에서 이른바 ‘이식문학사론’을 제창했으며, 단편서사시라는 새로운 시 형식을 창안하기도 했다. 기존 계급문학론의 한계를 넓히는 데 큰 성과를 남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본명은 인식(仁植)으로 서울에서 태어나 보성중학을 중퇴하고 일본 동경에 2년간 유학했다. 광복 후 ‘조선문학가동맹’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하다 월북했다.

(조영복ㆍ문학평론가·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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