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설명 :평양맥주공장 '가정부인 농구팀'이 경기를 펼치고 있다.
북한의 '프로 농구’ 열기가 만만치 않다. 프로라고 해서 남한과 같은 진짜 프로는 물론 아니다. 팀 운영은 우리의 실업팀과 비슷하고, 다만 경기 규칙을 국제 아마추어 경기와 완전히 다르게 하고 있을 뿐이다. 프로 선수라고 해서 실력에 따라 계약금이 달라지거나 하는 것도 아니다.

북한의 프로 농구는 남한과 꼭 같은 시기(1997년 초)에 시작됐다.

이 때문에 평소 남한 TV를 즐겨보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남한의 농구 열기를 보고 프로 농구를 출범시켰다는 추측도 나온다. 이때 북한에서는 남자부에서 '태풍' '돌풍' '우뢰' 팀이, 여자부에서는 '번개' '폭풍' '대동강' 팀이 잇따라 창단됐다. 팀 이름은 김위원장이 직접 지었다고 하는데 '대동강'을 제외하면 모두 '기상이변' 일색이어서 흥미롭다.

북한에서 농구는 그렇게 인기 종목이 아니었다. 그러나 1996년 10월 김위원장의 지시로 농구붐이 일기 시작했는데 당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권장되고 있던 '키크기운동'과 함께 대대적으로 확산됐다. 이때는 남한에서도 '오빠부대'를 몰고다니던 농구대잔치와 함께 농구가 청소년들에게 폭발적 인기를 끌던 시기였다.

북한에서는 프로농구의 출범과 함께 체육과학연구소 산하에 '농구연구실'이 설립돼 '과학농구'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또 "농구가 좋구나"(차호근 작사, 설명순 작곡) 라는 제목의 노래가 보급되고, "모든 부문, 모든 단위에서 농구를 대중화하자"는 선전화(포스터)까지 등장해 농구붐 조성을 거들었다. 프로팀과는 별개로 각급 학교와 공장·기업소 등 직장에도 농구 소조가 속속 조직됐고 주부농구팀·가족농구팀까지 생겨나 화제가 됐다.

가정주부들로만 구성된 평양맥주공장 농구팀은 만경대상체육경기대회를 비롯한 주요 대회에서 우승을 휩쓸어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북한 프로농구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경기규칙이다. 가장 큰 특징은 국제규칙에 없는 4점짜리와 8점 짜리 슛을 만들고 감점제를 도입한 것이다. 6.25m 밖에서 던진 공이 들어가면 3점을 주는 것은 국제규칙과 같지만, 이때 공이 림에 맞지 않고 깨끗하게 들어가면 4점을 준다.

또 6.7m 밖에서 던져 성공해도 4점을 인정한다. 덩크슛이나 탭슛은 3점을 준다. 반면에 자유투는 성공하면 1점을 주지만, 실패하면 1점을 감점 당한다. 또 팀반칙이 12개를 초과하면 그때마다 1점씩 깎는다.

북한 농구규칙의 백미는 8점 슛. 경기 종료 2초 전에 득점하면 무조건 8점을 얻는다. 이때문에 막판 뒤집기의 가능성이 높아 끝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한다.

북한은 프로 농구팀 창단과 함께 8·28청년컵 쟁탈 농구경기대회도 창설했다. 1997년 6월 이탈리아 클럽팀인 파브리아를 평양에 불러들여 경기를 가졌으며 이듬해 5월에는 미국의 대학팀을 초청해 실전경험과 국제감각도 익혔다. 1999년 9월과 12월 평양과 서울에서 각각 열린 통일농구경기대회에도 프로팀에서 차출한 선수들로 팀을 구성했다.

북한의 프로농구는 세계 최장신 센터로 미국 NBA 진출을 모색하고 있는 이명훈(235cm)이라는 걸출한 스타를 배출해 국제무대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북한의 마이클 조던'으로 불리는 가드 박천종(186cm) 도 유명하다. 선수들은 대개 소속팀에서 월급을 받는데 아마추어보다 조금 나은 대접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에서 프로 농구가 인기를 끌고는 있지만 그래도 가장 대중적 스포츠는 축구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외국과의 축구경기가 있는 날은 경기장이 메워지고 암표까지 등장한다. 북한에서 프로 축구가 등장하지 않는 것은 경기 규칙에서 아마추어와 차별성을 갖기 어렵기 때문으로 보인다. 프로종목으로는 농구에 앞서 권투가 1993년 평양에서 첫 경기를 가졌다.

/김광인 기자 kk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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