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을 넘어서-

분단 이후 처음으로 일반인의 대규모 평양관광이 지난 15일 시작됐다. 연합뉴스는 이번에 평양여행을 다녀온 경남대 정치언론학부 박성관(朴成觀)교수의 `분단을 넘어서'라는 평양관광체험기를 통해 북한주민의 삶과 문화를 엿보고자 한다.

태풍 “매미”의 울음소리를 뒤로한 채 남북분단 이후 최초로 직항로를 통한 민간인 평양관광 길에 올랐다. 120여명의 관광객들이 인천국제공항에 모인 15일 아침에 많은 취재진들이 몰려 촬영과 인터뷰를 시도하는 모습을 보고 이 여행이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직감하게 되었다.

민간인 최초의 직항로를 이용한 상업용 평양관광이라는 의미도 있었겠지만, 사실 남측에서의 북한 및 통일문제에 대한 소위 남남갈등이 나의 이번 여행을 더욱 부담스럽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리기가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계는 있겠지만, 나는 이번 여행의 초점을 북한주민의 삶과 문화에 대하여 정치적 편견을 배제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체험하는데 두기로 마음먹었다.

드디어 오전 10시경 북측의 고려항공에 몸을 싣고 평양관광이라는 부푼 가슴을 쓰다듬으면서 이륙을 기다렸다. 하얀 장갑을 손에 끼고 빨간 스커트와 연분홍 빛을 띤 하얀 상의에 주석 배지를 단 고려항공 여성승무원들은 남측 여행객들을 밝고 친절하게 맞아 주었다.

“휘파람” 노래가 흘러 나오면서 10시 50분 비행기는 이륙하였고 기내방송에 따라 여승무원들은 안전띠와 구명조끼 착용 시범을 보여주었다.

이후 여승무원들은 룡성배사이다, 룡성맥주, 금강산샘물, 룡성공장 강냉이과자 등을 서비스하고, 로동신문, 금수강산, 고려항공 표시의 부채를 선물로 주었다.

여승무원들의 부채 사인이 남측 관광객들 사이에 큰 인기였다. 여승무원들도 남측손님들과의 접촉이 너무 반가웠는지 나중에 뒷좌석 손님들이 먼저 내려야 하는 도착 안내도 잊을 정도였다.

서해 백령도 상공을 통과해 옆 좌석에 앉은 여승무원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덧 평양의 모습이 시선에 들어오게 되었다.

무르익고 있는 듯한 벼와 정비된 평양도로가 한눈에 들어 왔다. “다시 만나요”의 노랫가락이 흘러 나오는 가운데 오전 11시 45분 우리는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평양 순안공항에는 7층 정도의 관제탑과 지은 지 오래되어 보이는 청사 그리고 대형 비행기 15대 정도가 하늘을 날고 싶어하는 듯이 서 있는 외롭고 쓸쓸한 모습이 역력했다.

첫 민간관광팀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입국수속은 약식으로 진행되었고, 우리는 금강산국제관광총회사에서 마련한 일본산, 중국산 버스에 나뉘어 올라 안내원들의 소개를 받으면서 “공화국의 심장” 평양으로 향했다.

넓고 평평한 지역이라서 평양으로 불렸다는 이 북한의 수도는 외곽지대를 포함 인구 200만의 북한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중심지라고 안내원은 대략적인 설명을 해 주었다.

우리는 보통강 맑은 물에 빨래하고 있는 평양아줌마들의 모습을 바로 눈앞에 보면서 김일성주석이 아홉번이나 순시하였다는“보통강려관”에 도착했다.

간단히 체크인을 하고 점심을 먹으러 식당으로 갔다. 북한의 식량난을 잘 알고 있었기에 과연 어떤 음식이 나올 지 상당히 궁금해 했는데, 만두, 소시지, 명태국, 김칫국, 오징어무침, 오이냉채 등을 맛있게 먹었다.

보통강호텔의 음식은 인기가 좋아 많은 평양방문객들이 일부러 이 호텔 식당을 찾는다고 하였다.

식사를 마치고 오후 3시부터 본격적인 평양관광이 시작되었다. 이동하는 버스의 차장 밖을 내다보면서 방송을 통해서만 보던 파란 치마와 흰색 상의를 입고 절도있게 교통정리를 하는 여성을 보고 정말로 평양에 왔다는 실감이 났다.

길거리에는 결혼 기념을 위해 젊은 남녀 한 쌍이 행복한 듯이 밝은 모습으로 촬영에 열중이었고, 걸으면서 열심히 책을 보는 대학생들의 모습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관광스케줄에 따라 17개의 평양 지하철도역 중에서 부흥역과 영광역 구간을 직접 시승하는 기회를 가졌다. 평양시민 40만이 2분마다 정거하는 이 철도를 이용한다고 했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에스컬레이터를 탔는데 경사가 급하고 속도도 빨랐다. 많은 평양시민들이 반대편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손도 흔들면서 인사도 건네 주었다.

건설노래를 들으면서 도착한 지하역 내부는 상당히 어둠침침한 조명이었으나 웅장하고 원근법을 잘 이용한 공간이었다. 역시 북한은 지하개발에 남다른 재주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영광역에서 내려 잠시 기다리는 동안 평양시민들은 우리일행들을 보면서 대체로 무표정하고 담담하게 구경하는 듯 하였다.

다시 우리는 버스를 타고 보통강을 지나 광복거리의 컴퓨터센터와 많은 운동시설을 이용하면 젊어진다는 청춘거리를 통과하여 대동강 푸른 물을 따라 만가지 경치를 한 눈에 내다볼 수 있다는 만경대의 혁명사적지로 이동하였다.

우리 일행들에게 경건하고 엄숙한 자세를 요구하면서 주석과 그의 가족들에 대한 역사를 열성적으로 설명하는 안내원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후 우리는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을 방문하였다. 궁전마당에서 어린 학생 몇 명이서 서투르게 롤러를 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궁전 내에서는 아홉살, 열살 가량의 어린 학생들이 그림, 피아노, 무용, 아카디온 연습에 열중이었다. 질문에 대답할 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정중하게 또록또록 웃으면서 답변하는 어린이들의 예의바른 자세가 우리의 무의식적인 긴장감을 조금 누그려 주는 듯 하였다.

오후 5시30분에는 만경대학생소년예술소조원의 공연이 있었다.

무대 위에서 펼쳐진 학생들의 공연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여섯 명의 소녀들이 보여준 흔들북춤, 어린 소녀의 괘랭이춤, 여덟살 소녀의 고음저대독주, 만화무용, 가야금과 노래, 봉선화 꽃놀이 무용, 민속놀이 무용, 체조무용, 아동영화음악련곡, 군밤타령, 장고독주의 경음악은 정말 언제 듣고 보아도 신명나는 한마당이었다.

아쉬운 작별의 손을 흔들고 또 흔드는 학생들을 보면서 일부 관람객들은 눈물을 적시기도 하였다. 우리는 비교적 높고 깨끗한 아파트가 있는 평양의 강남 광복거리를 바라보면서 어두워져 가는 평양관광 첫날 밤을 맞이하였다.

다음 날인 16일에는 오전 7시에 콩밥, 계란구이, 감잣국, 팥빵의 아침식사를 하고 고구려의 시조 동명왕릉을 구경하기 위해 출발하였다.

마침 아침 출근길이라 길거리에는 전동차를 꽉 메운 평양시민들의 모습이 보였다. 주석의 소원이 통일이라는 말에 따라 만들어졌다는 일명 통일거리의 낙랑구역을 통과하여 3대헌장기념탑을 지나, 동명왕릉으로 가는 길거리에는 키가 큰 코스모스가 빨간, 하얀, 연분홍의 색깔로 사이좋게 서 있었고, 옥수수, 조, 감자, 남새 밭이 자주 보였다.

고구려의 건축양식대로 복구하였다는 동명왕릉은 20여개의 장군과 대신들의 무덤을 아래로 하고 홀로 우뚝 솟아 있었다. 마치 경주의 한 고분같은 느낌이 들었다.

동명왕릉에 대한 수령의 훈시를 다 암송한 안내원은 이조시대에 제주도에서 가져 온 소나무 1400그루가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는 설명을 자세히 해 주어 관광객들이 귀를 기울이게 만들었다.

평양사범대학을 나와 고향에서 일을 하게 되어 기쁘다는 말도 자랑스러운 듯이 말해 주었다. 동명왕릉 아래 정릉사라는 사찰을 구경하면서, 목탁소리도 들리지 않고 스님의 머리가 조금 길어 남측관광객들의 비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다시 평양으로 되돌아오는 길의 대동강변에서 미국의 푸에블로호가 전시되어 있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개선문 앞에 있는 새평양백화점에 들러 잠시 쇼핑시간을 가졌는데 남측관광객들의 열기가 뜨거웠다.

특히 북측 유명화가들의 그림이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천리마거리를 타고 우리는 점심을 먹기 위해 호텔로 되돌아 왔다. 점심은 육개장, 김치, 잡채, 튀김으로 준비되었다.

그 자리에서 북측의 평양이 고향인 한 노인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너무 세월이 많이 흘러 주소도 잊어버리고 도시도 많이 변해 실제 살던 곳을 찾기가 불가능하다”는 애절한 사연을 듣게 되어 참으로 착잡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었다.

점심을 먹고 난 후 우리는 평안북도의 정주로 나서기 위해 버스에 몸을 실었다. 정주로 가는 길은 쉽게 접할 수 없는 시골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협동농장이 자주 보였고, 산에 나무가 그다지 많지 않아 보였다.

시골집의 지붕에는 노란색 옥수수를 말리느라 멀리서 보면 마치 지붕 색깔이 노란 기와인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시골길에는 차들은 거의 다니지 않았고 논밭에서 일하는 모습도 찾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정주로 가는 도중 외교관들이 자주 들린다는 안주의 청천강여관에서 휴식을 잠시 취하였다. 여관로비에 주석과 장군의 사진이 크게 걸려있었는데 멋도 모르고 그 앞에 걸터앉아 있는 남측 관광객들을 보고 북측안내원이 급히 일어서라고 재촉하는 모습이 보이기도 하였다.

시골에서는 붉은 깃발을 꽂고 집단노동을 활발히 전개하는 모습도 보였다. 아스팔트를 만들어내는 동네 주민들이 상당히 힘들게 보였다.

북측에서는 이와 같은 대형사업에 집에서 쉬는 사람들의 노력동원이 이루어지기도 하는데, 힘든 노동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직업을 갖기도 한다는 얘기도 들었다.

시골에서 흙벽돌을 만드는 장면도 쉽게 접할 수 있는데, 시멘트 구하기가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군인들도 시골길에서 자주 보이는데 우리가 타고 있는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기도 하였다.

정주의 목적지에 도착하니 천막을 치고 음식을 차려 놓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우리를 환영하는 뜻으로 장만한 음식이라고 생각하여 고맙게 생각하였으나, 인민위원회 소속 당원들이 나와 판매하는 음식이라고 들었을 때 남측관광객들이 조금 실망하는 듯 하였다.

산삼과 참새구이를 포함해 주로 현지 토속음식들이었다. 약호박죽을 한 그릇 얻어 먹고 출출함을 달래고 난 후 다시 왔던 시골길로 되돌아 왔다.

이미 어둑해져 가는 시간이었기에 북측 주민들도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하는 모습이었다. 시골집들에 켜진 저 전등불 아래 과연 저 사람들은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인지 궁금하였다.

셋째 날에도 오전 8시부터 관광을 나섰다. 짙은 안개가 드리운 가운데 길거리에는 학생들이 등교하느라 단체로 줄지어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도로주변에 피어 있는 메밀꽃을 따라 물이 맑다고 하여 붙여진 청천강의 줄기인 묘향산으로 향했다. 향산갑문과 수력발전소를 지나 묘향산에 위치해 있는 국제친선관람관을 먼저 방문하였다.

주석선물관과 장군선물관의 두 개의 건물이 위치해 있는데, 많은 북측주민들의 방문행렬이 줄을 이었다. 관람하기에 앞서 신발 위에 덧버선을 덮어 신고, 가지고 있는 소지품을 보관대에 맡겨야 했다.

주석에게는 178개국 2만1744개의 선물이, 장군에게는 현재까지 161개국 5만1518개의 선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모두 다 자세히 구경하려면 적어도 1년 반 이상이 소요된다고 하는 어마어마한 양이 배치되어 있었다.

중국과 일본의 선물이 가장 많았고, 남측에서 대통령들과 각계각층에서 보내 준 다양한 선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어 법왕봉, 향로봉, 천태봉, 원만봉, 비로봉을 쳐다보면서 우리는 묘향산 만폭동 산행을 하였다. 중턱에는 북측인민들의 놀이 한판이 펼쳐지면서 많은 박수 갈채를 받기도 하였다.

산행 도중 나이키모자를 쓰고 있는 많은 북측 학생들과 주민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함께 자리를 같이해 우리의 소원 등 통일을 위한 합창을 부르기도 하였다. 북측주민들은 우리를 반가이 대해 주었고, 힘들어하는 남측노인들에게 지팡이를 선물하기도 하였다.

관광 마지막날인 18일에는 아침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오전에는 남포의 평화자동차 공장을 견학하는 일정이었다.

김일성주석 사후 수 많은 북측주민들의 피나는 희생으로 만들어진 10차선의 40킬로 길이의 고난의 거리를 지나 현지에 도착하였다.

공장에 색다른 이름을 붙인 공화국의 유일한 회사로서 이탈리아의 피아트와 합작하여 조립생산하는 공장이었다. 김정일위원장이 직접 작명하였다는 “휘파람”, “뻐꾸기”1호가 생산판매되고 있고, 현재 “뻐꾸기”2호 픽업차 출시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하였다.

버스를 타고 다시 평양으로 돌아와 개선문을 잠시 둘러 보고, 종로남새상점, 종로국수집 앞을 지나 옥류교, 능라도경기장, 김일성종합대학, 동평양대극장의 주체탑거리를 돌아 주석탄생 70돌을 기념하여 만든 주체사상탑을 관광하였다.

주체탑 위에서 평양을 한 눈에 내려다 보니 그야말로 공원속의 도시, 계획도시의 면모를 실감할 수 있었다. 안내원의 인상이 포근하게 보여 농담삼아 혜란씨라고 불러보니 무척 쑥스러워하는 기색이었다.

다시 버스를 타고 모란봉으로 향했다. 모란봉을 거닐면서 모란봉예술극장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를 벗삼아 국보유적 제19호이면서 평양8경의 하나인 을밀대에서 바라본 또 다른 절경은 그야말로 자연미의 극치였다.

국보1호 평양성을 따라 내려오는 중 군사훈련을 하다 점심식사를 하고 있는 여중생들을 만났는데, 또래의 학생들보다 키도 크고 얼굴이 이뻐서 고위층의 자녀같은 느낌을 받았다.

해방탑을 돌아, 대동강물이 너무 맑게 흐른다고 해서 붙여진 옥류관의 평양냉면을 먹으면서 평양관광 마지막날의 아쉬운 소회감을 달래어 갔다.

이어 대성전시관에 들러 마지막 쇼핑을 하면서 아빠는 외교관, 엄마는 대학교수를 둔 한 여성판매원이 자신은 공부를 안해 여기서 일하고 있다는 푸념어린 소리를 농담삼아 건네기도 하였다.

우리는 미국의 올브라이트 전국무장관이 들러 화제가 되었던 창광유치원에서 준비된 유치원 어린이들의 놀이와 수업참관을 하였다.

마침 사슴과 소에 대한 동물교육을 받고 있는 어린이들 중 한 명이 “집에서 소고기도 먹어봤어요”라는 말을 자랑스럽게 하는 소리를 듣고, 과연 남측에서 온 관광객들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이 어린이들은 월요일 아침에 맡겨져 토요일 오후에 부모들의 품으로 돌아간다고 하는데 당과 국가를 위하는 마음이 부모의 정보다 우선적이라는 설명을 들었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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