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 의학상 감" 극찬서
"배신자"로 낙인찍혀 추방..

1950년대 북한 역사에 혜성처럼 등장해 한 시대를 풍미하다 10여 년만에 거의 흔적없이 몰락해 버린 한 의학자의 삶은 월북 지식인들의 행로 중에서도 가장 특이한 경우다.

전통 한의학의 과학화에 성공한 ‘세계적 의학자’로 북한이 한때 대대적으로 선전했던 김봉한. 그의 등장과 퇴장은 북한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정치적 사건과 맞물려 있어 더욱 드라마적 요소가 짙다.

1956년 8월 평양에서 열린 노동당 8월 전원회의에서는 "8월 종파사건"이라 불리는 반(反)김일성사건으로 긴장이 고조된 가운데 "인민보건사업을 개선강화할데 대하여"라는 의제가 상정돼 토의됐다.

전해 12월 김일성이 사상사업에서 "주체" 확립을 강조하면서 확산되기 시작한 주체 열풍이 의학분야에도 밀어닥친 결과였다. 이를 계기로 북한에서는 동의학(韓醫學)의 육성과 과학화가 추진되는데 그 중심 인물이 김봉한이었다.

김봉한은 경성제대 의학부를 졸업한 서양 의학자였다. 그런 그가 왜 동의학 과학화의 선봉에 섰는지는 명확지 않다. 다만 그가 의학에 입문하기 전부터 동의학의 원리와 치료법에 깊이 매료돼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는 의학뿐 아니라 수학, 물리학, 철학 등에도 상당한 지적 수준에 이르러 있었고 뛰어난 두뇌와 학문적 열정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월북 동기나 과정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움 모르고 자란 그에게 사회주의자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게 그를 아는 지인들의 회상이다. 인민군 점령 하에서 자유의지와는 무관한 월북, 또는 납북이었으리라는 추측도 있다.

북한 사람들이 화학자 이승기와 함께 노벨상 감이라고 주저 없이 말했던 김봉한의 업적은 "봉한학설"에 집약돼 있다.

이 학설은 두 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전통 동양의학의 핵심개념인 경락(經絡)의 실체를 규명한 "봉한관설"이다. 다른 하나는 세포보다 작은 미세한 조직인 산알("살아있는 알"이라는 뜻)이 봉한관을 주행하면서 세포가 되고, 세포는 다시 산알로 변하기를 반복하면서 순환시스템 속에서 생명현상의 근본적인 기능을 수행한다는 "산알학설"이다.

이 이론은 1961년 8월 조선의학자대회에서 처음 발표된 이래 1965년까지 전후 5차례에 걸쳐 학술논문으로 발표됐다. 김봉한의 연구결과를 두고 북한당국은 흥분해 마지 않았다.

북한은 "이 위대한 발견은 현대생물학과 의학발전의 새로운 단계를 개척한 혁명적 사변이며 세계과학사에 금자탑을 이루어 놓았다"(조선중앙년감, 1964)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연구논문은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외부세계에 타전됐고 노동신문을 비롯한 매체들은 그의 업적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평양의학대학 교수였던 김봉한이 새로운 논문을 발표할 때마다 매체들은 앞다투어 대서특필했고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적어도 북한내에서는 없을 정도가 됐다. 1948년 9월 북한 정권수립 이래 김일성 이외에 특정인의 이름이 그토록 오랫동안 언론의 주목을 받은 적은 일찍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봉한학설에 대한 세계의학계의 견해는 긍정과 부정으로 갈리고 있었다. 긍정적인 견해는 관련자료 요청과 공동연구 제의, 견학단 파견 등으로 구체화됐다. 부정적인 반응은 면밀한 검증과 확인이 필요하다는 것에서부터 아예 무시하거나 냉소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나타났다.

기세가 하늘을 찌를듯하던 봉한학설에 대한 선전이 갑자기 멈춘 것은 1966년 무렵이다. 세계 각국으로부터 "경천동지할 대발견"으로 인정받아 마땅하다고 여겼던 봉한학설이 서양의학자들로부터 인색한 평가를 받은 것까지는 그런대로 이해할 만한 것이었다. 동의학을 서양의 분석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규명한다는 것 자체가 다소 무리로 보였던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과 북한 내부의 반발은 당사자인 김봉한은 물론이고 북한당국까지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일부 한의사들은 고층 건물에서 뛰어내리기까지 하면서 봉한학설의 "부당함"을 시위하고 나섰다.

이 즈음 중소분쟁 등 가파른 국제정세의 흐름을 타고 북한 권력 상층부에서 터져나온 갑산파 숙청사건은 김봉한과 그의 동료들을 막다른 상황으로 내몰았다.

김봉한팀의 경락연구에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던 당내 2인자 박금철이 종파사건에 연루돼 실각한 것이다. 그 불똥은 김봉한에게 튀었고 봉한학설의 처리를 놓고 고심하던 북한당국은 이의 폐기를 선언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봉한학설의 폐기가 결정되자 연구와 실험 외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던 김봉한은 하루 아침에 나라와 민족을 팔아먹은 배신자로 낙인되어 지방으로 추방됐다. 그가 쫓겨간 곳이 탄광이었다는 주장과 함남 정평군의 어느 시골 농장이었다는 설이 엇갈린다. 그는 얼마 후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북한의 모든 공식 문건이나 서적에서 김봉한과 그의 이론은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북한의 젊은이들은 그의 이름마저 모를 만큼 그의 제거는 철저했다.

북한에서 김봉한과 그의 업적을 아는 사람들은 "민족 앞에 죄를 짓고 인류 앞에 공헌했다"는 말로 그의 일생을 반추하고 있다고 한다. 그가 북한이라는 체제에서는 희생됐지만 언젠가 그의 이론이 의학 발전에 크게 기여할 것을 믿는다는 뜻이 담겨 있다.

봉한학설은 남한에도 전해져 일부 의학자들이 "반드시 재조명해서 복원해야 할 민족의 귀중한 과학업적"이라며 관심을 표명하고 있지만 그 목소리는 미약하기만 하다.

김봉한의 존재와 그의 학설이 역사의 한 에피소드로 끝나버릴지, 언젠가 화려하게 부활할 수 있을지는 가늠키 어렵다. 지금으로서는 월북지식인들이 피해가기 어려웠던 정치적 소용돌이가 의학자였던 그의 삶마저 삼켜버린 사실이, 그의 업적보다 더욱 비극적으로 두드러져 보인다.

◆김봉한(1916∼1966?)은 누구인가?

1916년 서울 돈암동에서 출생한 김봉한은 서울제2고보(경복고 전신)를 거쳐, 1941년 경성제대 의학부(서울대 의대 전신)를 졸업했다.

대학시절 그는 당시 최첨단 과학인 원자물리학에 흥미를 갖고 이에 흠뻑 빠져들었다. 이런 편력은 훗날 그가 동양의학의 핵심개념인 경락의 실체를 밝히는데 밑거름이 된 것으로 보인다.

대학 졸업후 여러 의대의 강사를 거쳐 경성여의전 교수로 있다가 6·25전쟁의 와중에 북한으로 갔다. 전쟁중 제2후방병원 의사로 배속돼 수술을 잘 해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전후 평양의학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동의학의 과학화에 주력, 동양의학의 핵심개념인 경락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규명한 봉한학설을 발표해 북한의학계를 풍미했다. 그러나 그의 학설은 10여년 뒤 정치적 이유 등이 섞여 용도폐기됐고, 그도 숙청 당한 후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광인기자 kki@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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