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년 북한을 탈출해 한국으로 온 이근혁(18)군이 내년 고려대 경영학과에 입학한다. 이군은 북한에서 고등중학교 3학년(우리의 중1)까지 다니고 학업을 중단했기 때문에 중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통과해야 했다. 99년 6월부터 공부를 시작해서 1년 2개월 만에 6년 과정을 끝낸 셈이다. 대학진학도 특례 입학이지만 나름대로 시험을 치러 합격했다.

“근 4년 동안 공부를 안 하다가 갑자기 하자니 어려운 점이 많았다 ”고 했는데 특히 영어와 사회 과목이 힘들었다고 말했다. 영어는 문법보다 ‘귀 ’가 트일 수 있도록 매일 테이프를 들으며 공부했는데 북한에서 영국식으로 배우다가 미국식 발음을 듣는 것이 어려웠고, 사회는 교과서에 담긴 사실 자체가 달라서 혼동되었다고 한다.

옛친구들 잊을까봐 밤마다 45명 이름부르기
1년 2개월만에 고입·대입검정고시 합격
대학가면 '진짜 북한'알리는 동아리 만들것

이군에게 지난 1년 남짓은 ‘친구라고는 ‘그림자 ’밖에 없었다고 한다. 어머니와는 중국에서 헤어진 상태였고, 평양 태생인 그에게 남한에는 친척이 없다. 한국에 와서 애초에는 진학을 할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14살에 시작한 장사를 계속해 돈을 벌 작정이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군의관 상좌(대령), 어머니는 김책공대 출신의 기자로 인텔리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나 평양에서 유복하게 살았던 이군의 삶에 큰 변화가 온 것은 아버지의 제대로 함흥으로 이사를 가고부터였다.함흥이 북한 제2도시라고 하지만 이군이 깨달은 것은 북한은 ‘두 개의 나라 ’라는 사실이었다.

‘평양 ’과 ‘평양 아닌 지역 ’이 명백히 나뉘어져 있어 어린 이군은 몹시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평양 아닌 곳에서 평양을 가기는 여기서 외국으로 가는 것보다 훨씬 어려울 겁니다.통행증 받기는 여기서 여권 받기보다 물론 어렵고요.” 무엇보다 아이들이 집안 살림을 걱정하느라 계산에 밝아 있었던 것이 놀라웠다고 한다.

“개인주의나 이기주의라고 할수는 없어요. 가족주의라면 모를까. 모두들 무엇을 팔면 얼마가 남는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가족을 위한 것이었어요.”

이군도 부모님이 한끼 식사를 걱정하는 모습에 공부보다 돈을 버는 것이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그때부터 생선을 떼어다가 황해도에 가서 쌀로 바꿔 다시 함흥에서 파는 식으로 밑천을 만들고 나중에는 금광에 가 금장사도 해서 제법 몫돈을 마련했다. 이때 북한 전역을 다니면서 사회 현실을 피부로 느꼈고 탈북을 결심했다고 한다. 3년에 걸친 철저한 준비끝에 어머니와 함께 국경을 넘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신 후였다. 중국서 헤어진 어머니는 지난 2월 한국으로 들어와 극적인 재회를 했다.

“막상 한국으로 와 보니 제가 해 본 장사는 그야말로 원시적이었더군요. 주식이니 금융이니 하는 것은 이해도 잘 안되고요. 그래서 경영학을 공부해 보고 싶었어요.”

대학공부를 마치면 이군은 본격적으로 사업을 해보고 싶다고 한다.

“나중에 북한에 있는 친구들과 함께 사업체를 경영하면서 공동주택에서 사는 것이 꿈 ”이라고 말하는 이군의 가장 큰 걱정은 한국으로 온 자신에 대해 북한의 친구들이 비겁한 녀석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사탕 한 알도 깨어 나눠 먹던 친구들이 너무나 보고싶습니다. 우리반 45명의 얼굴을 잊어버릴까봐 잠들기전에 한 사람씩 이름을 불러보곤 합니다.”

처음 이곳에 와서는 제 또래의 아이들이 너무나 이기적으로 보여 적응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자유의 이중적인 면을 보았어요. 학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선생님이 지나가도 담배불을 끄지 않더군요. 그렇지만 대학생들이 자신이 듣고 싶은 과목을 스스로 정하고 동아리에도 자유롭게 가입한다는 걸 알고 이게 진짜 자유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북한의 친구들과 나누었던 우정을 생각하면 이군에게 이곳도 만족스럽지만은 않지만, “70%가 나쁘고 30%가 좋은 나라에서, 30%가 나쁘고 70%가 좋은 나라로 왔다고 생각해요 ”라고 말했다. 이군은 대학에 입학하면 당분간 자유를 만끽하기보다는 일단 부족한 공부를 착실히 하겠다고 말한다. 영어를 듣는 귀는 많이 트였지만 아직 멀었다며 언제나 카세트 테이프를 갖고 다닌다. 그리고 대학에 가면 언젠가 자신이 동아리를 직접 만들어 보겠다고 한다.

“한국 학생들이 북한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직 사실에 근거해서만 북한을 전하는 동아리를 만들어 보고싶어요 ”

북한에서의 힘든 현실과 남한에서의 정착 과정을 겪으며 이군은 같은 또래보다 훨씬 깊고 폭넓은 사고력을 갖게된 듯했다. /김미영기자 miyou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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