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 널리 통용되는 1원짜리 지폐의 뒷면에는 영화배우들이 그려져 있다. 한가운데에는 ‘꽃파는 처녀’의 주인공 홍영희가 양손에 꽃바구니를 들고 서있고, 오른쪽에는 ‘피바다’의 주인공 양혜련이 빨치산에게 진입로를 터주는 장면, 그리고 왼쪽에는 ‘어느 자위대원의 운명’의 주인공 엄길선이 소총을 높이 들고 김일성 장군 품으로 가자고 절규하는 모습이 찍혀 있다.

◇북한 최고인기 배우 최창수(오른쪽)와 최은희가 주연한 '탈출기'의 한 장면

1원짜리 화폐에도 배우들 등장.... '높은 대우' 젊은이들 선망 대상

가장 널리 쓰이는 지폐에 영화배우를 그려넣은 나라는 아마 이 세상에서 북한밖에 없을 것이다. 그만큼 예술인을 높게 대우한다. 운이 좋으면 벼락출세도 가능하다. 노동당 예술담당 부부장이었던 최익규는 원래 영화감독이라는 막강한 자리에 발탁되었고 김정일의 측근 심복이 되었다.

배우가 되면 배급을 비롯한 대우가 일반 주민들과는 달라진다. 그래서 젊은 남녀들에게는 배우가 단연 선망의 대상이다. 각 기업소(공장)마다 서클활동이 활발한데, 그 중에서도 연극을 많이 하는 이유도 그런 데에 있는 것 같다.

인민배우·공훈배우가 되면 더욱 대우가 좋아지고 존경도 받는다. 우리의 기준으로 보면 그들의 생활도 딱할 정도로 형편 없지만 그것은 북한 전체가 가난하기 때문이다. 그 사회에서 예술가를 대접하려고 애쓰는 것만은 사실이다. 영화계에서는 김선영·유경애·남궁연·문예봉·김연실·문정복 등의 원로배우를 비롯해서 김정화·홍영희·엄길선·이준식·최창수·오미란 등 20여명이 인민배우이고, 공훈배우는 그의 2배쯤 된다. 감독이나 작가의 경우는 인민예술가로 불린다.

이를 정하는 것은 당, 즉 김정일이다. 젊은 배우라도 운이 좋아서 김정일의 눈에 들면 인민배우가 되는 것이다.

배우에 대한 물질적인 대우는 좋다고 하지만 예술가의 입장에서는 여건이 좋다고 하기가 어렵다. 워낙 제작하는 편수가 적어서 출연할 기회가 별로 없는 데다가, 상투적인 작품뿐이어서 예술적으로는 기량을 펼 수가 없다. 외국의 좋은 영화를 보는 등 공부할 기회도 거의 없고, 자극도 없다. 그러다 보니 왕년에는 쟁쟁한 연기자들이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시들어 있다. 예술가를 죽이는 사회제도인 셈이다.

우리 부부가 ‘탈출기’를 제작할 때, 왕년의 명배우 김연실씨에게 어머니 역을 맡기고 싶었다. 그런데 관절염으로 걸음걸이가 불편해 보였다. 건강상태를 걱정하며 조심스럽게 출연 의사를 묻자 그녀는 금방 “다리? 괜찮아! 촬영할 때는 안 아파! 걱정 말고 나좀 시켜 달라구. 나 신감독하구 죽기 전에 꼭 한 번 함께 일해 보고 싶다구”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멋진 연기를 하고픈 정열은 살아 있는데 기회가 없어 안타까워 하는 북한의 연기자들….

영화배우들뿐만이 아니라 ‘피바다 가극단’, ‘만수대 가극단’ 등의 여러 가극단의 연기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훈련된 예술가들은 많은데 공연은 고작해야 1년에 한두 편뿐이었다. 이처럼 쉬는 인력을 활용하여 제작한 것이 뮤지컬 ‘사랑 사랑 내사랑’과 ‘심청전’이었다. 노래와 춤에 훈련된 연기자가 이렇게 많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북한의 배우들은 창작단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촬영이 없어도 회사에 나가듯 출근한다. 촬영이 없을 때는 연기 연습이나 시 낭송 등 이른바 ‘기량훈련’을 한다. 촬영소의 청소나 잡초뽑기 등의 환경미화도 예술가들의 몫이다. 아까운 재능들이 그렇게 썩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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