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사람은 한국으로 못 들어왔으면 아마 죽었을 겁니다.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되어 있었거든요." 지난 7월 납북어부로서는 최초로 생환해 현재 경기도 안성의 탈북인 재교육시설 하나원에 살고 있는 이재근(62)씨 일가의 최근 표정은 무척 밝았다. 모두들 '언제 잡힐까 하는 공포감에서 벗어나서 마음이 편해진 것이 무엇보다 기쁘다"고 했다.
◇30년 전 납북됐다가 2년 전 탈북해 지난 7월 귀환한 이재근씨 가족의 요즘 모습

저인망 어선 봉산22호 선원으로 1970년 4월 29일 새벽 2시경 연평도 근해에서 조업중 북한 경비정에 납북됐던 이씨는 30년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북한에서 결혼한 부인 김성희(58)씨와 아들 성재(25)씨와 함께였다. 이씨는 결혼할 때도 '나는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갈 몸'이라고 일러주었다고 한다. 결국 98년 북한을 빠져나와 1년 반을 중국을 전전하다 언론과 정부의 힘으로 구조되었다.

고향 많이 변해... 서울 근교에 정착했으면

그러나 이재근씨가 탈북자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은 뜻밖의 일이다. 호적을 갖고 있는 한국 국민이지만 그를 마땅하게 대우할 만한 법률이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부 당국의 설명이다. 30년 만에 돌아온 한국은 "샅샅이 꿰고 있었던 서울거리를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고, 고향 울산의 옛 집터에도 가보려 했지만 부두가 메워져 분간을 할 수 없을 만큼 온통 변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씨는 "하나원에서 재교육을 받는 것이나 탈북자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 것에 별로 불만이 없다"고 말했다.

북서 낳은 아들 대학 가는 것 보고 싶어...

한국으로 오기 전 중국에서 "왜 국가에 부담을 주느냐. 세금낸 적 있느냐"는 한국 영사관 관리의 추궁을 들었던 터라 구조만으로도 감사하다는 것이었다. 이씨는 지난 30년간 세금을 내고 싶어도 낼 수 없는 처지에 있었다. 앞으로의 꿈은 막일이라도 해서 생활비를 벌고, 외아들 성재씨를 서울에 있는 대학에 보내는 것이다. 아들이 북한에서 공부를 잘했다며 자랑스러워했다. 열심히 컴퓨터 교육을 받고 있는 성재씨는 "아직 무엇을 전공할지는 정하지 못해 앞으로 1년간 사회경험을 쌓아 결정할 작정"이라며 수줍게 말했다.

하나원의 불문율은 과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하나같이 슬픈 과거를 감춘 탈북인들은 상처를 꺼내면 서로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씨는 배급이 끊긴 이후 북한의 처참한 상황을 이야기하며 여러 차례 눈시울을 붉혔다. 같은 납북어부 중에서도 굶어 죽은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12월초 하나원에서 나오게 될 이씨가 바라는 것은 서울에서 가까운 곳에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당국은 주택과 보호경관 문제로 수도권은 어렵다는 입장. '왜 고향으로 가지 않느냐'는 질문에 "고향 친구들은 10여 척의 배를 가진 부자가 돼 있기도 하고 기반을 잡아 잘 살고 있는데 60줄에 맨손으로 다시 시작해야 하는 자신이 그들과 어울려 살기는 어려울 것 같다"면서 "나는 평생 고향을 떠나 객지생활을 해왔다. 죽을 때까지 객지생활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97년 12월에 생환한 국군포로 양순용씨도 애초에 탈북자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거기에 참전에서 귀환에 이르기까지 밀린 군인 월급 202만원이 더해졌을 뿐이다. '국가를 위해 싸운 대가가 이것인가'라고 생각한 양씨는 돈이 든 통장과 도장을 국방장관 앞으로 되돌려 보냈고, 99년 국군포로대우에 관한 특별법이 만들어져 소급해서 적용받을 수 있었다.

송환된 납북자를 위한 국가적인 대책은 아직 전무한 상태다. 다만, 지난 1일 국회 농림해양수산위는 국정감사에 앞서 '납북어부 송환촉구 결의문'을 여야 만장일치로 채택한 바 있고, 의원들 사이에서 480여명에 이르는 납북자와 송환된 납북자를 위한 대책을 입법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사지에서 살아 돌아온 국민의 한 사람인 이재근씨에게도 '섭섭치 않은' 대접과 환영이 기다리고 있을지 아직은 알 수 없다. /김미영기자 miyoung@chosun.com
저작권자 © 조선일보 동북아연구소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