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년 춘향전 뮤지컬 "사랑…" 암표 나올 정도로 인기폭발

영화는 그 사회의 현실을 되비추는 '사회의 거울'이다. 그러나 북한의 영화는 그렇지가 못하다. 위정자들이 원하는 것만을 비추는 일그러진 거울이랄까.


◇최초로 강간 장면이 등장한 강경애 원작 '소금'에서 열연하는 최은희씨.
북한도 사람이 사는 곳이고, 사람이 사는 곳이니 당연히 복잡미묘한 사랑의 감정이 있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그런 표현이 없었다. 할 수가 없었다.

밀고 당기는 삼각관계는 '부정한 것'이어서 안 되고, 키스신도 물론 안된다. 그러니 영화가 단조롭고, 극적 긴장감이나 윤기가 없었다. 남쪽에서는 성적인 표현이 값싸게 넘쳐나서 걱정이고, 북한에서는 지나치게 억제해서 답답한 것이 한반도의 문화 현실이다.

우리 부부의 ‘신필림’은 이런 금기들을 하나 하나 깨 나갔다. 현실에 밀착한 '리얼리티'가 있는 영화라야 대중적 설득력도 강하게 마련이다. 기관사 일가의 이야기인 ‘철길따라 천만리’에서 처음으로 남녀간의 삼각관계를 시도했고 키스 장면을 처음으로 화면에 담았다. 이에 대한 북한 주민들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흥미를 넘어서, 자기들의 생활 현실이 영화에 반영되었다는 공감, 억압적 구조에서 벗어난 해방감 같은 것이라고 나는 느꼈다. 북한 주민들에게 가장 큰 문화 충격을 준 것은 역시 춘향전을 뮤지칼로 만든 ‘사랑 사랑 내 사랑’이었다. 그때까지 북한에서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영화제목에 쓰인 적이 없고, 영화 대사로도 써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영화제목에 '사랑'이라는 낱말이 세 번씩이나 들어 있으니 그것부터가 신선한 파격이었다.

이처럼 파괴적임에도 불구하고 김일성, 김정일 부자도 이 영화를 대단히 흡족하게 생각하여, 1985년 1월 1일 김일성이 주최한 신년축하연회가 끝난 후 참석자들에게 특별상영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들도 새로운 소재의 개발이 필요하다는 점은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영화가 극장에 붙여지자 전국적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어, 암표까지 등장하는 인기를 모았다. 북한 영화계 최초의 암표였는데, 10전짜리 입장권이 1백배나 되는 10원으로까지 거래되었다고 들었다. 일반 노동자의 월급이 60∼70원이었으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만큼 북한 사람들이 사랑과 재미있는 작품에 굶주려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사랑 사랑 내 사랑 어화 둥둥 내 사랑...."으로 시작되는 이 영화의 주제가인 ‘사랑가’는 전국적으로 크게 유행하여 남녀노소 모르는 사람이 없을 지경이었다. 이런 인기 덕에 우리 부부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인기인이 되었다. 2천만명의 팬이 새로 생긴 셈이었다. 그들은 우리의 새 영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인간적인 것마저 금기로 묶는 억압적 제도로 인해서 북한 사회는 경직되어 있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도 눈치를 봐야 하는 것이다. 개성을 특구로 개발한다는 소식이 참으로 반갑다. 박연폭포, 선죽교, 공민왕릉 등 개성의 풍경들이 떠오른다. 그와 함께 김두봉과 황진이의 이야기도 생각이 난다. 내가 제6소 감옥에 있을 때 함께 옥살이를 하던 역사학자 이나영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김두봉은 북한의 부수상을 지낸 사람이다. 국문학자로서 평소에 황진이를 이해하고 호감을 가지게 된 김두봉은 개성에 간 길에 일부러 황진이의 묘를 찾아가 헌화하고 술을 부은 뒤 절을 했다고 한다. 김두봉이 부수상 권좌에 있을 때는 이것이 아무런 문제가 아니였지만, 그가 연안파로 숙청의 대상에 올랐을 때는 '황진이 묘 사건'이 결정적인 숙청의 구실이 됐다는 것이다.

"일국의 부수상이라는 자가 기생년의 묘에 꽃다발을 놓고 술을 따르고 절까지 했다니, 있을 수 있는 일이야?"

죽은 황진이가 산 김두봉을 잡았다는 이야기다. /신상옥 vknews@a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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