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자식은 어머니 편이라지만 저는 다릅니다. 어머니는 질색하시는, 술주정까지 포함한 아버지의 모든 것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존경해 왔습니다. 아버지는 술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취기가 오르면 노래도 즐겨 부르고 말씀도 곧잘 하시던 분이 50줄에 들면서 말수도 적어지고 우시곤 하는 것을 보면서 측은한 마음을 금할 길 없었습니다.

추방돼 굶주린 저에게 "평생 모은 훈장 다 갖다줘도 쌀 1kg과 못바꾸는구나" 탄식하며 우셨죠

32년 함북 나진에서 태어난 아버지는 조부모님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갔습니다. 6.25때 18세 청년이었던 아버지는 중국인민지원군 탐지기부대에 자원 입대했습니다. 무슨 부대인지 국방군이나 미군은 콧등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다시 중국으로 돌아간 아버지는 하얼삔 공업대학에 입학해 분석화학을 전공했고, 동창생인 어머니와 결혼했습니다. 왜소하고 가무잡잡한 어머니의 약을 올리느라 아버지는 취기가 오르면 “너희 엄마가 머리가 빨리 돌고 엉치가 가벼워서 데리고 살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64년 제가 9살 되던 해 아버지는 북한으로 들어와 조선인민군 군관(장교)이 되었습니다. 군내 정치보위부에서 조선인민군 대좌(대령)까지 올랐다가 89년에 제대했습니다. 저는 군관복을 입은 아버지의 모습에서 남다른 긍지를 느끼며 자존심을 키워 왔습니다. 저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과 관심은 특별했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병이 나면 아버지 등에 업혀 병원 출입을 한 유일한 자식이었습니다. 학생시절 학교에서 열리는 학부형회의에는 아버지가 직접 나오곤 했습니다. 집안일을 도맡아 하느라고 늘상 바쁜 북한의 어머니들을 아버지들은 학부형 회의에도 떠밀어 보냅니다. 아주머니들 아니면 꼬부랑 할머니들만 주른히 앉아 있는 학부형 회의를 가부장적 위신을 중히 여기는 북한의 아버지들이 좋아할 리가 없었지요.

아버지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습니다. 학교 선생님들이 부탁하신 일들을 절대로 소홀히 하지 않고 수단껏 풀어주셨습니다. 5형제 중 저에 대한 특별한 애정에 어머니가 항의를 할라치면 “맏이가 잘 되면 그 밑의 것들은 저절로 잘 돼”라는 한 마디로 일축해 버리곤 했습니다.

이제 시집 장가간 동생들은 아버지와 마주치는 술상에서 어려워져만 가는 생활형편을 두고 “아버지가 힘이 있을 때 다른 집처럼 재산도 좀 모으고 우리를 먹을 알 있는 직업에 밀어 넣어 주셨더라면…”하고 은근히 원망하려 듭니다. 그러면 정의와 양심이 살아있는 아버지는 “그런 놈들은 다 나쁜 놈들이다”고 자신의 처사를 정당화하곤 했습니다.

아버지의 진정한 아픔을 제가 알게 된 것은 탈북하기 일년 전 추방지에서 평양으로 가만치 새어들어가 마지막으로 부모님을 만났을 때였습니다. 아버지는 햇볕에 타고 굶주려 사람꼴이 아닌 저와 딸아이를 보고는 술을 드시고 마냥 울었습니다.

아버지는 깊은 밤 저를 불러 앉히고 당신께서 30여년의 헌신적 군관복무 기간에 김일성 김정일로부터 받은 한 바가지나 되는 훈장과 메달을 앞에 자르르 쏟아 부으며 탄식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내가 평생 받은 댓가다. 그런데 이 훈장을 다 털어 주겠대도 쌀 한 키로 내놓을 사람이 없구나…”

인생의 4/4분기에 와서 감수한 그 허무한 마음이, 그렇게도 정성을 쏟아 부은 맏딸의 추방과 탈북으로 더 무거워졌을 아버지…. 지금은 어디에 계실까.

달빛이 스며드는 창가에 서서 보고 싶고 또 보고 싶은 아버지를 그려보노라면 어디선가 아버지의 아픔이 제 손에 와닿곤 합니다. 그것은 나무람도 원망도 아닌 저를 향한 기원과 구원의 호소입니다.

아버지는 비록 멀리 떨어져 있어도, 생사조차 모르고 있어도 언제나 사랑하던 이 딸을 굽어보시며 걸어간 가시밭길을 헛되이 하지 말고, 민족을 위해 뜻있는 일을 하라고 축복을 뿌려주고 있을 것입니다.

복잡하고 긴장된 하루일과를 마치고 침상에 들 때마다 저는 아버지를 만나 뵙길 기대하곤 합니다. 그리고는 귀를 기울여 어린 시절 듣던 아버지의 구수하고 취기어린 노래 소리를 듣습니다.

“눈이 내린다 흰 눈이 내린다...”

김길선(45)씨는 1955년 중국 선양(심양)에서 출생, 1979년 김일성종합대학 조선어문학부를 졸업한 후 1995년 말까지 제2자연과학 출판사 정치선동부 기자로 일했다. 이 출판사는 북한 경제의 60%를 차지하는 군수산업 분야를 다루는 비공개 출판물을 제작하는 곳이다. 김씨는 1997년 8월 가족(남편, 딸)과 함께 탈북, 1999년 1월 남한에 정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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