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브라이트 방북때의 카드섹션: 99년 세계 육상선수권대회 여자 마라톤에서 정성옥이 우승하는 장면을 카드섹션으로 그려내고 있다.


북한의 ‘집단체조’ 실력은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의 방북 때에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10만 명이 한치의 빈틈도 없이 현란하게 펼치는 장면들은 인간의 작품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사진설명 : ◇북한의 해외 잡지 '조선'에 실린 집단체조 연습 장면.
북한의 집단체조는 1947년 김일성의 지시에 의해 첫선을 보인 이후 1971년 11월 국가체육지도위원회 산하에 `집단체조 창작단`이 설치되면서 북한 특유의 집단체조가 본격화 됐다. 평양체육대학에는 집단체조학부 창작학과가 있어 전문가를 키워내고 있다.

평양 청소년들, 몇달씩 체벌받아가며 연습...큰 보상 뒤따라


집단체조에는 평양 중심부에 살고 있는 청소년들이 동원된다. 대개 집단체조는 큰 행사인 경우는 6개월, 보통행사는 4개월 정도의 연습 기간이 걸린다. 동원 인원이 5만명 이하일 경우에는 평양 중심부 학교에서만 참여하고, 그 이상일 경우에는 평양 외곽지역에서도 충원한다. 고등중학교 3학년(한국의 중학교 1년에 해당)부터 6학년 사이의 학생들이 주로 참여하는데 몸이 아주 약하거나 특별히 불량한 학생을 제외하고는 모든 학생들이 참여한다.

처음 한달 정도는 집단체조에 필요한 각종 물품들을 장만하고 정리하는 데 걸린다. 카드섹션에 참가하는 학생들은 작도라고 불리는 큰 책 모양으로 된 색종이를 준비해야 한다. 북한의 종이 질이 좋지 않아 색종이는 수입용을 구해야 한다. 최근에는 이런 물품들을 학생 개개인이 준비해야 돼 학부모들의 부담이 작지 않다.

작도는 보통 한 사람이 100 장 정도이다. 각 장마다 번호를 매기고 각종 색종이로 무늬를 그려 넣어야 한다. 한장 한장 마다 색깔과 무늬가 다르다. 담임선생의 지도를 받아 작도가 완성되면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간다. 만들어진 작도는 나무함에 넣고 다니며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 보통 한 학급이 45~50명 정도인데 카드 섹션 대열의 세로 한 줄이 한 학급이다. 한 줄의 책임자는 담임선생이다. 학교단위의 책임자는 체육선생과 사로청위원장이 맡으며, 이들은 또 체육위원회 소속 전문가들의 지도를 받는다. 총지휘자는 주석단(본부석) 아래에 위치해 수기로 지휘하며, 각 학교별 지휘자가 이를 받아 다시 학급별 담임선생에게 전달하는 식으로 움직이게 된다.

학생들의 연습 과정은 여간 힘들지 않다. 10kg 정도의 작도를 메고 몇달 간 경기장을 오가는 것부터 쉽지 않다.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지정된 번호의 종이를 꺼내 펼치고 접고, 또 어떤 때는 머리를 숨기는 등 갖가지 동작을 정확히 익혀야 한다. 한사람 한사람의 역할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옆사람을 따라 할 수도 없다. 한 사람의 자그만 실수도 전체를 망가뜨리기 때문에 실수에 대한 처벌은 매우 엄격하다. 실수하는 순간 선생님의 매가 사정없이 쏟아진다.

실제 상황에서 실수가 일어난다면 엄청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특히 가운데서는 김일성 김정일의 얼굴이 자주 그려지는데, 한 사람이라도 자칫 실수해 얼굴에 ‘점’이라도 생기는 날에는 모든 게 끝장이다. 훈련은 아침 7시부터 밤 12시까지 진행된다. 고된 훈련으로 두세 달이 지나면 입술이 트지 않은 학생이 없을 정도다. 입 옆까지 찢어져 입을 벌릴지 못하는 학생들도 속출한다. 몸이 약한 학생들은 도중에 쓰러지기도 하는데 이때는 예비 학생으로 즉시 보충된다.

학생들은 고된 훈련을 ‘충성심’ 하나로 이겨낸다. 실전이 가까워 올 수록 연습의 강도는 더욱 높아진다. 그 어려운 종이 번호 외우기도 몇 달간 연습으로 눈 감고 외울 정도가 된다.

드디어 행사 날. 행사 시작 30분 전에는 모든 학생들이 각자 위치에 들어가야 한다. 카드섹션의 경우 밀집해야 하기 때문에 일단 들어가면 움직일 수가 없다. 시작 2시간 전부터 용변을 보게 한다. 그래도 4시간 정도는 참아야 하기 때문에 용변을 볼 수 있는 용기까지 준비해야 한다. 학생들은 전날부터 가급적 물을 마시지 않는다. 갑자기 설사라도 만난 학생은 죽음을 각오하는 심정으로 행사에 참가할 수밖에 없다. 행사 진행 중에는 스탠드에서 선 채로 용변을 보는 학생들도 생긴다. 추위와 긴장으로 용변은 잦아지게 마련이다.

그라운드에서는 집단예술체조가 펼쳐진다. 여기에도 몸의 유연성이나 체질에 관계없이 학년 전체가 동원되기 때문에 적잖은 무리가 따른다. 연습과정에는 다리 벌리기, 앞 구르기, 뒷 구르기 등 갖가지 동작을 하루종일 익힌다. 이렇게 6개월 정도 훈련하면 아예 체형이 바뀔 정도가 된다. 아무리 뚱뚱한 여학생들도 날씬하고 탄력있는 몸매로 바뀌어 진다. 몸매가 바뀔 정도의 강훈련인 것이다.

행사가 끝나면 갖가지 사연들이 공개되고 표창을 받는다. 행사 기간에 부모가 사망하였음에도 흔들림 없이 훈련을 계속한 학생에게는 청소년 최고훈장인 김일성청년영예상이 주어지기도 했다. 또 학급별, 학교별로 각종 상들이 주어진다. 김정일 위원장은 행사가 끝날 때마다 선물을 내리는데 매번 종류가 달라진다. 그가 크게 만족한 경우에는 행사에 공로를 세운 사람에게 컬러TV를 주기도 한다.

1985년 중국의 호요방 주석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집단체조에 참가했던 조승군(33)씨는 “행사가 끝나고 6만 명의 모든 학생들에게 돼지고기 1.5㎏씩 주었는데, 온 집안식구들이 모여 앉아 그걸 먹을 때에는 수령에 대한 충성심과 내가 처음으로 뭔가를 해 냈다는 뿌듯한 자부심을 느꼈다”고 말했다.

1995년 평양 련광고등중학교 재학중 노동당 창건 50주년 행사에 참가했던 한수정(20)씨는 “행사가 성공적으로 끝나고 김정일의 칭찬을 받으면 모든 고통이 한 순간에 사라지고 마음은 긍지로 가득찼다”면서 “그때 행사 참가자들에게는 이태리제 가방, 금촉 만년필,제도기, 고급노트 등이 선물로 주어졌다”고 말했다. 한씨는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습고 어리석은 일”이라면서 “평양의 학생들이 가엾다”고 말했다. /강철환기자 nkch@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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