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계통에서 근무한 경력을 가진 푸틴 대통령 체제가 출범하면서 세계는 러시아의 대외정책, 특히 군사안보 정책에 어떤 변화가 올 것인가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미 지난 1월 10일 러시아는 ‘신 국가안보개념’을 발표, 안보에서 국내적 요소를 강조했던 97년 12월 발표안을 대치했다.

이바노프 외무장관도 최근 러시아의 대외정책에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발언을 했다. 그런 변화는 푸틴 개인의 경력과 관계되는 것이기보다는 개혁 노선이 채택된 후, 특히 최근 코소보와 체첸 사태를 겪으면서 러시아인 대다수가 느끼며 생각해왔던 것의 반영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고르바초프에서 옐친으로 이어지면서 지난 10여년간 러시아는 애써 친 서방적 자세를 유지해왔다. 강성국가의 이미지를 버리고, 평화를 애호하는 선진 민주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려고 노력해왔고, 그렇게 함으로써 사회주의에서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하는 데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서방 측으로부터 이끌어 낼 수가 있었다. 러시아는 말하자면 서방식 게임법칙에 따라 게임을 해 온 셈이다.

그러나 소련 같은 크고 복잡한 나라에서 70년 묵은 구체제를 청산하고 새로운 정치, 경제 질서를 구축하는 것은 많은 시간과 시행착오를 요하는 작업이었다. 구체제가 이미 파산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개혁의 구호를 들고 나왔던 것임을 잘 알지 못하는 많은 러시아인들은 ‘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가 빈국(빈국)으로 전락하여 세계가 미국의 독무대가 되다시피 해도 막을 길이 없게 된 것은 고르바초프가 서방의 감언이설에 속아 러시아가 가지고 있던 힘을 제대로 써보지도 않은 채 스스로의 정체를 포기한 탓’이라고 생각했고, 나토(NATO)는 동구권에 대해 인권 우선 원칙을 내세우며 코소보에 개입하고, 체첸 사태에 관해 러시아를 비판하자 그런 견해는 설득력을 더 얻어갔다. 푸틴의 신 안보개념은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신 안보개념의 핵심은 국가 안보를 위한 핵무기 사용 가능성의 확대와 군비 증강의 필요성 강조에 있다. 곧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힘을 이제는 한껏 쓰겠다’는 이야기다. 1997년까지만 해도 러시아는 핵 무기의 사용을 제한적으로 할 것을 천명했으나, 이제는 핵무기에 관한 상대방의 입장에 대한 고려 없이 안보와 국익수호에 필요하면 언제고 사용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것을 ‘러시아가 야욕적 침략세력으로 둔갑하겠다’는 뜻으로 확대 해석할 필요는 없다. 그보다는 ‘지역 분쟁 등 모든 국제문제 해결 과정에서 러시아를 배제시키는 것은 더 이상 용인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풀이 할 수 있으며, 러시아 국민에게 자긍심을 심어주겠다는 국내 정치적 고려도 빼놓을 수 없다. 내정에서도 법질서의 확립을 통한 국가권력의 강화와 부패척결을 강하게 주창할 것으로 기대되는 푸틴은 국제관계에서도 ‘평화적 질서의 구축을 위해 투명한 힘 겨루기는 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는 서방과의 관계 악화를 원치 않고 있으며 시장경제 원리에 입각한 경제개혁을 계속하여 러시아가 강한 경쟁력을 가지고 국제 경제로 편입되어야 할 것을 주창하고 있다.

푸틴의 신 안보개념은 동북아, 그리고 한반도 문제에서도 러시아는 미국이 영향력을 독점하는 것을 용납하지는 않을 것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경우에 따라서는 대미 관계에서 북한 카드를 좀더 적극적으로 활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반면에 경제적 실리외교도 신 안보개념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우리의 대북 포괄정책이 러시아 측의 전폭적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에서는 푸틴의 신 안보정책이 우리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리라고 우려할 필요까지는 없다. 새로운 도전은 동시에 새로운 기회이기도 한 것이다. /이인호 국제교류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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