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께서 "옛날 노래야"라며 남몰래 찬송가 가르쳐 주셨죠

내가 태어나서 자란 평양북도 피현군은 선천, 평양, 의주와 더불어 해방 전까지 기독교도가 많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거의 모든 군민이 기독교도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아버지는 기독교 장로였고, 어머니는 1971년 돌아가시는 날까지 꿋꿋이 신앙을 지키셨다.

사진설명 : ◇최영주(61)씨는 북한에서 기독교 신앙을 간직하다 97년 남편과 함께 한국으로 왔다.

어머니는 새벽 1~2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매일 이불 속에서 기도하셨다. 해방직후 남으로 내려간 아버지를 다시 만날 수 있는 길은 통일밖에 없다고 믿으셨기 때문에 '평화통일을 향한 염원'은 빠지지 않는 기도제목이었다. 나는 넷째딸이었지만 결혼 후에도 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살았던 덕분에 신앙을 이어받을 수 있었다.

내가 북한에서 마지막으로 성경을 본 것은 1947년이었다. 당시 북한 당국은 기독교인 집안을 수색해 성경과 찬송가책 등을 압수했다. 그 후로는 어머니의 구전으로 찬송과 성경을 익혔다. 1996년 중국으로 와서 50년만에 성경과 찬송을 다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대부분 머리 속에 들어 있었다. 내가 모르는 찬송가는 거의 한 곡도 없을 정도였다. 내 아이들도 그렇게 신앙을 이어 받았다. ‘달고 오묘한 그 말씀'으로 시작되는 찬송을 들려주면 아이들은 ‘사탕과자도 아닌데 어째서 말씀이 달다는 거냐'고 묻기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배워나갔다.

가끔 기독교인들이 어디어디서 발각되어 처형되었다는 얘기가 들려오기도 했다. 두려움속에서도 우리는 사람들이 없는 틈에 찬송가를 불렀다. 찬송가는 '산타 루치아'나 '돌아오라 소렌토로' 등의 가곡과 함께 부르기도 했다. 학교에서는 배운 적이 없는 이런 노래들을 아이들도 좋아했다. 아련한 그리움을 일으키는 이런 금지곡을 우리는 '옛날 노래'라 불렀다. 아이들에게는 찬송가도 처음에는 ‘옛날 노래’라며 가르쳤다. 아이들은 ‘옛날 노래”를 바깥에서 부르면 안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나의 남편은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지만 1987년경 믿음을 갖게 되었다. 그가 하루는 내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는 것이었다.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남편에게 '살다 보면 어려운 일이 있다. 그럴 때 하느님께 기도하라'고 했던 것이 생각났다고 했다. 나중에 영문을 알았다. 북한에서는 출근해서 제일 먼저 해야 하는 일이 김일성 김정일 초상화를 닦는 ‘정성사업’이다. 이 일을 하다가 남편은 그것을 깨뜨려 버린 것이다. '유일사상 10대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북한에서는 이보다 무서운 일은 없다.

새파랗게 질린 남편은 비로소 하느님께 기도했다고 한다. 기적같은 일이 일어나서 남편은 무사할 수 있었다. 때마침 병원에 검열대가 닥쳐 15일간 검열을 받느라 당 비서가 남편에 대한 조치를 잊고 넘어간 것이다. 10대 원칙 위반의 경우 3일 안에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당비서도 문책을 받게 돼 있어, 아예 ‘없었던 일’로 하기로 한 것이다.

1990년대에 들어 얼마간 숨통이 트였다. 나라가 어려워지면서 사회통제가 약해졌다. 우리는 서로 믿을 수 있는 신자끼리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 성경이 없으니 십계명을 외워 설교를 대신했다. 몇 사람이 비밀리에 모여 앉아 소박한 예배를 드리는 이 모임이 바깥에서 말하는 북한의 지하교회인 셈이다.

가까운 사람들 중에 남한의 극동방송이나 기독교방송을 몰래 듣는 이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우리집에는 단파라디오가 없어 한 친구에게 성경말씀을 좀 적어달라고 부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글로 적어 남기는 것은 너무도 위험한 일이었다. 친구는 성경 구절을 받아 적은 쪽지를 돌돌 말아 머리카락 속에 넣고 모자를 눌러 쓰고 와서는 구절을 읽어보게 했다. 읽고 난 종이는 불에 태워 없앴다. 얼른 보고 태워버린 그 깨알같은 구절들은 영원히 내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1997년 남편과 함께 한국으로 왔다. 북한에서는 여전히 많은 기독교인들이 탄압받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어머니는 살아 생전에 "김일성 집안도 독실하게 기독교를 믿는 집안이었는데 왜 저리 탄압하는지 모르겠다"고 한탄하셨다. 많은 사람들이 북한 땅에서 종교의 자유를 갈망하고 있다. 그들에게 빛이 비쳐지기를 지금도 쉬지 않고 기도 드린다. (정리=김미영 객원기자 miyou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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