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3월 30 일 일본항공(JAL) 요도호를 공중납치한 일본 적군파 학생 9명은 서울을 거쳐 평양으로 들어갔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 이들의 거취가 다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북한에 대한 미국의 테러지원국 해제와 관련해 이들의 북한 추방 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한 것이다.

요도호 사건후 북한은 납치범들을 정치적 망명자로 대우, 여러가지 배려를 해주었다. 납치범들은 북한에서 제일 살기 좋은 평양에 주택을 배급받고, 경제적 지원도 받았다. 북한 당국의 적극적인 중매(?)로 6명이 일본인 여자와 결혼했다. 이들 일본인 여자중 5명은 북한공작원으로 보이는 사람과 접촉했다는 등의 이유로 일본외무성에 의해 여권 반납 명령을 받은 실종 여인이었다. 요도호 납치범 가족 32명은 지금도 집단으로 평양에 거주하고 있다.

90년대 경제난으로 북한정부가 이들에 대해 지급해 오던 자금 지원을 중단함으로써 이들도 본격적으로 생계유지에 나서게 되었다. 평양시내 보통강호텔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일-조 친선 여행사’를 설립해 일본 국내의 지원그룹을 통해 관광객을 모집하거나 북한책과 상품을 일본에 수출하는 무역업을 하고 있다.

그동안 리더였던 다미야 다카마로와 요시다 긴타로 2명은 병사했다. 그리고 북한으로 갈 때 16살이었던 시바타 야스히로는 1985년 일본으로 돌아가 지하운동을 하다가 체포돼 3년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했다. 이를 통해 북한 체류 납치범들은 일본으로 돌아가 재판을 받을 경우에도 3-5년 정도만 복역하면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90년 6월 납치범들은 가이후 도시키 당시 일본 총리 앞으로 귀국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협의에 응해줄 것을 요구하는 편지를 발송하기도 했다

96년 태국에서 발생한 다나카 위조 달러 사건은 그 배후에 북한이 관련하고 있다고 해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결국 태국경찰이 무죄판결을 내리고 그를 일본으로 송환시킴으로써 사건은 일단락 되었다.

납치범들은 자신들의 귀국을 위해 여러가지 활동을 전개해 왔다. 자신들의 근황, 한반도 정세에 대한 의견 등을 인터넷을 통해 내 보내기도 한다.

평양에서 태어나 북한 초중고등학교를 다니고 나진-선봉지역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는 다나까의 딸 다나카 아즈미는 일본으로의 귀국을 희망하는 자신들의 처지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태어나서부터 계속 평양이었기 때문에 언어와 관습에 하나도 위화감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졸업후 나는 갈 곳이 없었다. 이때 나는 일본인이라는 자각을 처음으로 하기 시작했다."

다나카 아즈미는 납치범인 아버지들이 늘 했던 이야기라면서 이렇게 덧붙혔다.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인민(승객)을 인질로 했던 것은 잘못된 일이었다. 인민의 위에 자신을 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위에 인민을 두어야 한다./신정화 일본게이오대학 박사(북-일관계 전공) jungwha@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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